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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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4 - 개화기 구포와 화명의 민족학교

  • 1999-03-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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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사립구명학교(私立龜明學校) 설립 배경

구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로서 구한말 근대화의 물결이 밀어닥쳐와 일찍 개방이 되었던 곳으로서 역사적인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浦口)로서 일찌기 상업이 번창하고 교역이 성했던 곳이었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선각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문물을 능히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발 맞추어 설립된 것이 바로 구포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구포사립구명학교(龜浦私立龜明學校)인 것이다.
구한말, 나라가 약육강식하는 열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침략의 야수를 뻗쳐 오는 강압적 사태 속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절박한 때를 당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앞날을 바르게 인식할 줄 아는 슬기를 가진 인재를 육성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국의 곳곳에서 서당(書堂)의 한문 교육 대신 신학문을 배우는 학교의 설립이 그 지역유지들에 의해 제창되었으니 구포에서도 한 걸음 앞서 뜻 있는 분들의 학교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일합병 이전이던 1906년(광무10년) 11월에 관직에 있었던 박형전(朴灐栓-전 참봉), 윤상은(尹相殷-전 주사), 이경화(李敬和-전 군수), 장우석(張禹錫-전 의관) 등을 비롯한 발기인 26명의 이름으로 구포에 사립구명학교를 세울 것을 제창하게 되었고, 지방 인사들이 이에 호응, 자진하여 찬조금을 내어 놓음으로써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때 작성한 『구포사립학교 취지서(龜浦私立學校 趣旨書)』와 찬조자들의 『설립기금 기부서』가 현재 구포초등학교에 잘 보관되어 있다.
세계의 열강을 바라보는 견지에서 국가와 민족의 교육이 절실함을 제창하고 다 같이 힘을 합해서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구명학교(龜明學校)라고 부르고자 한다는 구구절절이 민족교육의 긴요함을 역설한 이 취지서는 사양길에 접어들어 어수선한 국가의 운명 앞에서 안타까워 하던 구포지역 유지들의 간절한 소망이 잘 담겨져 있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게 하고 나아가서 민족이 살길은 교육이라고 외치던 선각자들의 뜻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는 늦었으니 교육이란 단시일내에 그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열강의 간섭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낼 힘은 없지만 장차 조국을 이 곤경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시작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구명(龜明)이란 『구자는 신명지족이 사령지일아(龜者 神明之族而 四靈之一也)』의 뜻에서 구명학교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취지서에 밝히고 있다.
구포사립구명학교가 문을 열어 1년제 졸업생을 배출하는 가운데 일본의 간계와 압박에 의하여 나라가 망한 뒤에도 계속 교육을 하다가 일정(日政)의 방침으로 공립으로 이관되어 구포공립 보통학교(龜浦公立 普通學校)로 개교하게 되었다.
공립학교가 되면서 구포보다 2년 뒤에 설립되었던 화명리(華明里)의 사립화명학교(私立華明學校)와 구포의 여학교였던 사립정명의숙(私立貞明義塾)이 구포공립보통학교로 통합되었다.


사립화명학교(私立華明學校) 설립

구포와 화명은 일찍부터 개명한 마을로 우국(憂國)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립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고 학교를 중심으로 민족정신의 정도(正道)를 찾고 있었다.
화명동에도 일찍부터 신학문을 받아들여서 구포의 구명학교에 이어 사립화명학교를 설립하였으니 이로써 마을 사람들의 수준과 마을의 재력도 짐작할만한 것이다.
사립화명학교(華明學校)는 한일합방이 되기 2년전인 1908년 설립되었으니 구포학교(龜浦學校)가 설립된 2년후의 일이다. 멀지않은 거리에 구포학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명동에 다시 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기울어가는 국운이 개탄스러운 나머지 민족의 소망을 한갖 교육에 걸었기 때문이다.
1908년 6월 이 마을 유지이던 윤명의(尹明儀), 허주(許鑄), 윤대의(尹大儀), 김두호(金斗昊), 최유수(崔有壽), 장진원(張鎭遠), 윤영우(尹永祐), 양기택(楊基澤) 등이 시세(時勢)의 진운(進運)을 깨달은 바 있어 인근 대천(大川), 공창(公昌), 동원(東院), 화잠(華岑), 용당(龍塘), 수정(水亭)의 7개 마을에 학교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29일 발기인 대회를 열어 44명이 출석하여 학교를 창립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다음달 7월 7일에 제2차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기금 문제를 의논하여 7개 부락에서 2천18원과 산판(山坂) 12고(庫)를 마련, 기본금을 확보하고 교명(校名)은 사립화명학교(私立華明學校)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7월 15일에는 한치유(韓致愈), 부윤(府尹)의 찬도(贊導)를 얻게 되었고 동래군 좌이면 화잠동 적석원(東萊郡 左耳面 華岑洞 赤石員)에 교지(校地) 600여평을 80원에 사서 여기에 교사(敎舍)를 건축하였다. 이런 일은 그 당시의 동세(動勢)에서 보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련했던 기금 중에서 교사건축비(敎舍建築費)와 기구및 비품 구입비로 922원을 지불하고 나니 1천86원이 남았었다.
수업연한(修業年限)은 예비과(豫備科) 1년, 본과(本科) 4년, 보습과(補習科) 2년으로 정하고 1908년 11월 20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입학생은 모두 50여명 이었다.
초대교장에는 윤대의(尹大儀)가 취임하고 감독은 허주(許鑄), 학감(學監)은 김시주(金時柱), 장진원(長鎭遠), 김두호(金斗昊), 교감에는 최유수(崔有壽), 양기택(楊基澤)이 피임(被任) 되었다. 그리고 초대(初代) 교사(敎師)로 문대홍(文大洪)과 김희태(金熙泰)가 청빙(請聘) 되었었다.
1910년 3월 30일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 다음 해에는 제2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다. 그동안 교사 윤석우(尹碩佑)가 박수걸(朴秀杰)로 교체, 1911년 4월에는 원(元), 박(朴) 두 교사가 사임하고 윤 경(尹 涇), 임봉래(林鳳來)가 취임하였다.
다음 해에는 이들도 사임하고 최현국(崔鉉國), 양봉근(楊奉根)이 교사로 취임했었다. 윤 경(尹 涇)과 임봉래(林鳳來), 양봉근(楊奉根)은 후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구포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였다.
1911년 4월부터는 학칙에 의하여 화명학교에 보습과(補習科)를 신설하여 여기에 졸업생 중에서 희망자를 수용하였다.
이때 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용 도서는 맹자와 산학통편(算學通編), 초등대수학(初等代數學), 고등소학이과(高等小學理科) 등 이다.
1913년 4월 3일 보습과 3명, 제3회 본과 3명이 졸업하였다. 보습과는 1914년 7월 7일 자동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교장이 윤종의(尹鍾儀)로 교체되어 제5회 졸업생 5명을 사회에 진출시킨 후 1918년 4월 1일 폐교되어 구명학교와 합해져서 구포공립 보통학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마을에서는 학교 유지(維持)를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이끌어 나온 것은 오로지 향토의 교육열의 덕분이었다.
1915년 화명동의 농지확보를 위해 백포(白浦)에 제방(堤防)을 쌓게 되었을 때 학교에서는 해당 지주회의를 학교 직원실에서 열고 학교에서 제언(堤堰)과 수문(水門)의 부설을 부담할 것이니 각 지주들은 그때로 부터 만 10년간에 걸쳐서 매년 벼 40석을 학교에 납부해 달라고 요청하여 쌍방 계약이 성립되고 시역(施役)한 일이 있었다.
백포의 제방은 이렇게 생겼으며 마을의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동민들의 열의와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학(私學)에서는 전통적으로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사립화명학교(私立華明學校)가 구명학교(龜明學校)와 함께 구포공립 보통학교(龜浦公立 普通學校)로 통합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 화명동(華明洞)과 금곡동(金谷洞)에 사는 학생들은 길이 좋지않아 나룻배를 많이 이용했는데 통학에 불편이 매우 컸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