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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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터 3·1만세 운동 재현

  • 1999-03-25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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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날을 맞아 구포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구포장터 3·1만세 운동」이 지난 3월 13일 오후 1시30분부터 구포역 일대에서 80년만에 재현되었다.
1919년 3월 29일 구포장날을 기해 일어난 이른바 ‘구포장터 의거'는 학생, 종교인, 유림 등이 주도한 타 지역의 3·1운동과는 달리 농민, 상인, 노동자 등 구포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순수 민간주도 운동으로 단순시위보다 저항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청은 우리고장에도 3·1운동에 참여한 역사가 있다는 자긍심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심어주고 IMF 극복정신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구민들의 의지를 집결하기 위해 이번에 첫 행사를 가졌다. 13일 오후 1시30분부터 옛 구포장터였던 구포역 일대에서 펼쳐진 이 행사에는 당시 구포의거 참가자 후손 등 독립 유공자 20가족을 포함한 주민 등 3천5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 참가자들은 구포여중에 모여 출정식을 가진 뒤 집결지인 구포역을 향해 3개조로 나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참여 인파로 가득 메운 구포역 광장에서는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유공자 대표의 만세삼창에 이은 그 당시 애국지사들의 활동상을 재현한 주재소 습격 장면인 단막극을 펼쳐 행사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이어진 3·1운동 기념비 앞에서의 만세삼창과 구포지역 3·1운동 증언 및 3·1절 노래의 합창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은 3월 1일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 동래의거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양봉근과 구포면 서기 임봉래 등이 거사할 뜻을 모으고 구포장날인 3월 29일(음력 2월 28일)을 기해 독립만세를 일으켰다. 이날 정오 구포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로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이에 놀라 허겁지겁 시위 현장으로 달려온 일경은 김옥겸외 11명의 주동인물을 체포하여 구포주재소에 구금했다. 이를 본 군중들은 격분해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의 유리창을 파괴하며 돌을 던졌다.
특히 장을 보러왔던 김해, 양산, 동래 등 외지 사람들도 북받쳐 오르는 민족적 의분으로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다. 주동 인물 중 가장 연세가 많았던 윤정은(尹正殷)은 당시 68세로 징역 1년 3개월을 받아 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사의 이모저모
*…이번 행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려 3천500여명의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 점차 잊혀져가던 그날의 함성을 만방에 알린 뜻깊은 행사였다는게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중론.
*…집결지인 구포여중에서는 만장기와 태극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홍완식 부구청장의 개막선언과 3·1동지회 북부지회장의 만세삼창 및 부산지방보훈청장의 출정선포가 잇달았다.
*…출정선포가 있자 제1그룹은 구포1동사무소에서 구포역으로, 제2그룹은 구포시장 샛길에서 구포역으로 또 제3그룹은 구포대교에서 구포역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거리를 행진.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소리로 가득 메운 제2부 행사인 구포역 광장에서는 권 익 구청장의 인사말씀, 정형근 국회의원의 격려말씀,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삼창, 주재소 습격 재현으로 이어졌다. 특히 80년전 그날의 만세운동을 단막극으로 재현한 주재소 습격 장면은 각 언론사에서도 열띤 취재 경쟁을 벌여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임을 실감케 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김민주 학생은 “우리고장에도 3·1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행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며 긍지를 갖게 돼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정신과 질서의식은 수준급이었다는게 행사 관계자의 말이다.
*…3부 행사인 3·1운동기념탑 앞에서는 이종택 구의회 의장의 인사말씀과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의 구포지역 3·1운동증언, 3·1절 노래합창과 지역원로 및 우리지역시·구의원의 우렁찬 만세삼창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