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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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동원진나루터(하)

  • 2023-07-27 16:30:46
  • 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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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동원진나루터(하)

우리구 문화·역사 / 동원진나루터(하)
일본교역 근거지로 사신 등에 편의 제공
 
동원진나루터(東院 水站)는 낙동강을 왕래하는 배를 조망하고 배로 강을 건너거나 이용하는 공무 수행인들과 왜(倭)의 사신, 일반인들의 숙식 등 편의를 제공하였던 포구였다.
수참의 역할을 하던 지역은 지금의 금곡대로 550번길 대우이안아파트 내 놀이터 주변으로 안내판이 보존되어 있다.
2004년 경남문화재연구원 발굴에서 수참의 규모는 2동의 건물터(建物址)와 담장석열 2기, 석조유구, 기타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초기 축조는 고려 중·후기, 수축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이며 임진왜란 이후 폐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기록을 보면 ‘신증동국승지요람’의 양산군 산천조(山川條)에 동원역이 나오며 ‘세종실록’에는 양산군 동원진에 수참을 두고 역무를 보게 하여 대일교역(對日交易)의 근거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사신이 삼포(三浦: 부산포, 염포, 제포)에 도착하여 서울 상경로 중 첫 기착지가 동원이었다.
이곳에서 사신들이 가져온 예물과 교역물품을 물류창고에 거두어들이고, 대구 화원-상주 함창–충주 조령관을 넘어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 동평관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이러한 행로는 조선 전기에 이뤄졌으며 임진왜란 이후 다시 일본과 교역이 시작됐 때는 다른 행로가 생겨났다. 감동진의 조세미(租稅米) 등 세곡 수납, 운송, 보관 등과 감동장의 포구상업 중심이 되고, 그리고 밀무역의 감찰단속 기능을 관장하던 동래부가 동원진에서 구법진(仇法津)으로 옮기면서 동원진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구법진은 지금의 덕천동 덕성초등학교 지역으로 밀무역 단속을 위해 찰방이 드나들던 나루터였는데, 1903년 경부선 철도공사 때 땅을 돋우면서 제방역할을 했다. 이후에 토사가 퇴적되어 전답지로 변하였으며 지금은 주택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원진나루터 강변에는 500여년 된 당산나무가 있어 이곳을 지나는 배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라져 버렸다.
김동국 / 희망북구 편집위원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