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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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문화유산을 찾아서 24 - 만덕동

  • 1998-02-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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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山水)가 뛰어난 명당자리

                                            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장)



상학산의 산세(山勢)


만덕동(萬德洞)은 조선시대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동래부서면(西面) 만덕리(萬德里)로 나와있다.
그 당시 구포지역은 양산군 좌이면(梁山郡 左耳面)에 속해 있었지만 만덕리만 산 너머 동래쪽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제초기 구포가 동래군에 소속되면서 동래군 구포면 만덕리가 되었는데 이곳에는 사기(寺基)마을과 상리(上里), 중리(中里), 하리(下里), 신촌(新村) 마을이 있다.
예로부터 만덕동은 풍수지리상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왔다. 이곳의 산세(山勢)를 강변쪽에서 올려다보면 제일 먼저 상학산(上鶴山)의 상계봉(上鷄峰)이 첫눈에 보인다.
금정산(金井山)과 함께 지도에 공식적으로 나타나 있는 산이 바로 상학산이다. 북쪽에 금정산(고당봉)이 있고 남쪽으로 상학산(상계봉)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금정산과 함께 상학산은 지역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상학산은 원래 쌍학산으로 학(鶴)이 양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는 명산이다. 깎아지른듯한 수십길의 직벽과 기암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상학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상계봉(上鷄峰)인데 산 정상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닭의 볏을 닮았다는데 유래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가 부근에서 가장 높아 새벽이 다른 곳보다 먼저 밝아온다는 뜻으로 상계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봉우리 자체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상학산은 풍수지리상 학의 근본 몸통이 되는 산으로 북쪽으로 화산(華山), 동쪽으로 파리봉(파류봉)이 있고 남쪽으로 병풍암(屛風岩)을 거쳐 쇠미산(金湧山)까지 벋어내리고 있다. 그리고 백양산 능선을 따라 오르면 현재 신만덕 지역의 서쪽으로 주지봉(蛛蜘峰) 산줄기가 둘러서 있다.
상학산 아래에는 고려시대 사찰로 엄청난 규모의 축대가 보존된 금당지(金堂址)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는 만덕사(萬德寺) 절터가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창건된 병풍암 석불사(石佛寺)가 마애석불을 배경으로 그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만덕사와 근대에 조성된 병풍암 석불사와는 500년이 훨씬 넘는 공백이 있지만 이곳 만덕동이 상학산을 배경으로 산수가 뛰어난 고장으로서 큰 불사(佛事)가 태동할수 있는 명당 자리임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덕 상리 마을에는 만덕사의 안산(案山)인 비룡산(飛龍山)이 우뚝 솟아 있고 초읍으로 가기위해 넘던 부태고개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산이 함박처럼 생긴 함박산이다. 그리고, 명당자리인 만덕사의 좌청룡(左靑龍)은 용을산(龍乙山)이다. 이 산은 강변쪽을 차단하고 있어 만덕사가 선승(禪僧)들의 도량(道場)으로 속세(俗世)와의 인연을 끊고 있는 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학산이 서쪽으로 벋어내린 곳에 하리(下里)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남쪽 입구에는 동백산이 있고 상학산으로 오르는 곳에 산 머리가 낙타등처럼 생긴 뽈록한 동산이 있다. 이곳을 뿔당골이라고 하는데 풍수지리상 장군혈(將軍穴)이 서린곳으로 장군이 말을 타고 가는 형상을 한 명당자리다.
계속 상학산 쪽으로 올라가면 벼슬등이 나오는데 이곳도 명당자리로 이름값을 하는 곳이다. 이처럼 명당이 많은 이곳 골짜기를 가야골이라고 하며 건너편 주지봉 동쪽 줄기 아래에 소가야골이 있다. 이들 지명에서 가야시대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만덕계수 하류의 동쪽 대장골에 가야시대 고분이 발굴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만덕의 주산(主山)인 상학산의 산세(山勢)는 이처럼 많은 역사의 내력을 안고 있다.


만덕계수(萬德溪水)의 수로(水路)


산자수명(山紫水明)이란 말이 있다. 만덕에서 흘러내리는 하천(河川)이란 뜻이 담겨있는 덕천(德川)은 조선시대 기록에 만덕계수(萬德溪水)로 나와있는데 상학산의 골짜기 마다 흘러 내리는 물들을 받아안고 산줄기 따라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만덕 계곡의 가장 큰 줄기는 금정산성(金井山城) 남문(南門)쪽에서 흘러내린 물이다. 이 물이 병풍암 석불사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하여 만덕사 금당지 앞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만덕사와 관련된 전설이 깃든 용을산의 용을천(龍乙川)을 받아 안고 만덕 중리 마을로 흐른다. 만덕동에서 가장 중간에 위치한 중리마을은 현재 신만덕이라고 부르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마을 입구의 부산지방중소기업청이 들어선 곳에서 위쪽으로 복개천 도로를 따라 약 100m 올라가면 옛날 중시골이라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이 계곡 웅덩이는 고려시대 만덕사 스님들이 목욕을 한 곳이라 중시골, 중선골 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만덕 물탕골폭포의 내력


상학산에서 만덕 하리쪽으로 흘러내리는 곳에는 물탕골이 있다. 이곳에는 물이 차다는 소문이 나서 옛날 여름철에 땀띠가 난 사람들이 몸을 씻으려 찾아들던 명소였다.
일제시대 모친(母親)이 무당(巫堂)인 안대목이란 사람이 이곳 물탕골에서 흘러내린 물을 집수(集水)하여 나무로 흠을 파서 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여기에 흘러내린 찬 물은 땀띠에 특효로 소문이 나서 칠월칠석(七月七夕)을 전후하여 해거름때가 되면 구포, 사상은 물론 멀리 김해에서도 이 폭포의 물을 맞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안대목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지만 외지인들에게는 물값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때 살던 집은 후에 기와를 입혀 절이 되었다.
만덕계수는 하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합쳐서 큰 냇물이 되어 물이 수평을 이루면서 덕천동 남산정마을을 거쳐 기찰 연둥개로 해서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곳 남산정과 만덕 하리 입구까지 만덕사가 번창했던 고려시대에는 작은 강을 이루어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물길이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메워져 큰 도랑이 되었지만 구한말(舊韓末) 경부선 철로를 놓기전만 해도 덕천동 기찰에 배가 드나들었으니 그 이전에는 만덕하리 입구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은 아닐 것이다.


만덕의 기암괴석(奇岩怪石)들


이처럼 산수(山水)가 빼어난 만덕동 일대에는 많은 산과 계곡, 골짜기에는 갖가지 형상의 기암괴석(奇岩怪石)들이 널려 있다. 우선 상학상 정상 주변 만덕동 쪽에 있는 이름난 바위만 하더라도 열손을 꼽아서 모자잘정도다.
닭볏처럼 생긴 상학산 정상방위, 곰바위, 양근(陽根)바위, 부부바위, 성(城))처럼 생긴 성바위, 온갖모양의 돌이 모여있는 일가(一家)바위, 영감할망바위, 그리고 옛날 만덕에서 나무를 하러 오르내리던 아이들이 지게를 던져 놓고 게으름을 피웠다는 깨을바위, 비가 오면 피하던 지운바위가 있다. 만덕고개 옆산 정상에는 상(上)바위가 있다. 만덕사 위쪽 차밭골이 있는 곳의 계곡 중앙에 있는 장사바위, 가제가 많던 물가의 가제바위, 박쥐가 살던 뽈찌바위, 상계봉의 닭 모이가 된다는 뫼(餌)바위, 근세에 만덕터널 입구에 걸인들이 살았던 거러지바위도 있었다.
중리마을에는 중시골 웅덩이 위에 있던 중시바위, 하리마을에는 만덕초등학교 위에 있는 새이(상여)바위, 만덕1동 16통 ∼18통 뒤쪽 산에 있는 사자바위, 이곳에 주택단지가 되기 전에 있던 마당바위와 평바위는 지금은 이름만 전해져 온다.
그런데 바위에 얽힌 웃지못할 이야기가 하리 마을에 전해온다. 이처럼 산수(山水)가 뛰어난 명당자리인 만덕에서 제일 못사는 동네가 하리 마을이었다.
이곳 만덕하리와 덕천동 남산정 마을과 경계지점인 산쪽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어느 과객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이 바위를 가르키면서 그 바위가 만덕하리 쪽을 넘어다 보고 있으니 그 때문에 못사는 동네가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은 하리마을 사람들이 남포를 터뜨려 그 바위를 깨어버렸다. 그런데 이곳에 사상 모라의 박씨문중 산소가 있었는데 그 집안에서 크게 항의를하여 시멘트로 깨어진 바위를 보수해 주었다고 한다. 그 큰바위의 땜질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만덕에서 제일 늦게 마을을 이룬 곳이 신촌(新村)이다.
이곳은 원래 중리와 하리 마을 사이에 논이 있던 지역으로 상학산의 작은 물줄기가 이쪽으로 흘러내렸는데 이곳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만덕계수 큰 도랑물이 있었다.
신촌마을을 뻔덕이라고 하는데 이 지명은 옛날 국유지로서 돌산이 있던 곳으로 여기에 있는 돌들이 낙동강제방을 쌓을 때 다 실려가고 그 산 삐얄(비탈)에 남아있는 땅이라서 뻔덕이라고 하였다. 근세에 와서 논이 있던 곳의 주변에 움막을 지어 사람들이 들어와 처음 15가구쯤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말로 ‘중리마을에서 신촌살림 내줬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만덕동은 산수(山水)가 뛰어난 명당자리로 지금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