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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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구포장터 3·1만세 운동(上)

  • 2023-02-01 14:06:15
  • 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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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구포장터 3·1만세 운동(上)

우리구 문화·역사 / 구포장터 3·1만세 운동(上)
구포장날인 3월 29일 정오에 거사 결행
 

임봉래·양봉근·윤경 등 주도
장꾼들과 “대한독립만세” 외쳐

 
1919년 3·1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부산에서는 동래와 부산부에서 만세 시위가 먼저 시작되었다. 구포지역은 구포장날(음력 2월 28일)에 구포장터 3·1만세 운동의 거사를 하게 되었다.
구포장터 만세운동의 시발점은 양봉근(1895~1990, 화명 와석)이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후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 구포면 서기로 있던 임봉래를 찾아가 만세운동의 실상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윤경, 류기호를 만나 구포지역 정세를 검토한 후 구포에서 빨리 거사를 할 것을 당부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사전모의와 준비활동=주동 인물인 임봉래(1890~1968, 화명 와석)는 1912년 사립화명학교를 사임하고 구포면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 중순경 양봉근이 구포면 독립운동의 거사를 의논하자 흔쾌히 승낙하고 윤경과 류기호를 만나 거사를 모의했다. 그리고 구포리의 박영초와 이수연 집을 옮겨가면서 김옥겸, 김윤길, 허정, 김용이, 최종호, 유진영, 윤대근 등과 모의 후 장날인 음력 2월 28일(양력 3월 29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장날로 정한 것은 동래장날(3월 13일), 양산읍 장날(3월 27일)의 거사와 장꾼, 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저항장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임봉래는 동지들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광목천에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를 쓴 플래카드를 주도인물 12명이 직접 만들었다고 보인다.
◇경과=구포장날인 3월 29일 정오에 주동 인물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박덕홍, 손진태, 김장학, 이몽석, 정치호, 권용학, 안화중, 허희중 등에게 나누어 주고, 장꾼 1000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자 삽시간에 장터는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화(化)하였던 것이다.
김동국/ 희망북구 편집위원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