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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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세거지(世居地) 하

  • 2023-12-26 19:33:37
  • 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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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허씨·파평 윤씨·함양 오씨 타지서 이주
 
◇화명 수정 김해 허씨(金海 許氏)=시조 허염(許琰, 김해 수로왕비 35세손)은 고려 문종 때 가락군으로 봉해졌으며 15세손 허곤손이 김해 활천으로 거주를 옮겨왔다.
그 후에 손자 허주(許鑄, 호 海山 1843~1924)는 김해 명지의 염전업으로 부(富)를 축척한 뒤 조카 허섭을 데리고 화명 수정으로 이거(移居)하였으며, 1908년 사립화명학교를 설립해 감독 및 2대 교장을 엮임하고 구포장터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인 선생의 손자(허정), 질서(김옥겸), 학교 교사 출신(임봉래·양봉근) 등 후학을 양성했다.
허섭(許灄, 호 守菴 1862~1930)은 1914년 구포장터화재 기금을 희사(喜捨)했으며 화명과 동래로 가는 길인 대장골의 안전을 지켜내기도 했다. 해당지역은 산적의 본거지로 이들이 주변 민가로 내려와 양식과 생필품 등을 약탈하자 수정마을을 대표하여 매년 1회 양식을 주기로 협약하여 마을의 안녕을 유지하였다.

◇구포 대리 파평 윤씨(坡平 尹氏)=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윤신달(尹莘達, 893~974)이다. 부산지역 입향조 윤성익(尹聖益)은 고려시대 윤관의 20세 후손으로 밀양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양산, 기장, 구포 등지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구포 대리마을에 정착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입향조의 증손자 윤홍석(尹洪錫)으로 사천현감, 동래부사를 역임했다. 장남 윤필은(尹弼殷)은 동래부윤을 지냈으며, 아들 윤현태와 윤현진이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고, 차남 윤명은(尹命殷)이 울산,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3남 윤상은(尹相殷, 호 聽雲 1887~1984)은 한말 개화기의 선각자로 근대교육을 위해 사립구명학교 설립 및 3대 교장을 지냈다. 또 1907년 구포저축(주)를 설립해 1912년 구포은행으로 개칭하는 등 민족자본을 축적하고 구포 기로사를 창립해 구포지역의 자본형성과 주민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장남 윤인구(尹仁駒, 1903~1986)는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과 연세대학교 총장을 재임하였다. 그리고 윤정은(尹正殷, 1852~1920)은 구포장터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 항쟁하다 옥중에서 순국하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중재실 삼복재(三福齋)는 선산이 있는 양산 물금 오봉산자락에 있다.

◇구포 연동 함양 오씨(咸陽 吳氏)=함양 오씨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시대 좌복야 상장군을 역임하였고, 중시조 오경원(吳慶遠)과 4촌 오건(吳健, 호 德溪)이 산청 지리산 자락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모와공파 7세손 오석국(吳錫國)은 가족들을 데리고 18세기 중반 구포 강변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이 정미업, 제분·제면 등에 종사했다.
그 중 오명구(1916~1962)는 남선곡산(주)를 운영하면서 대한제분협회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대기업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이윤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자세로 구포지역 청년들의 학구열을 돕기 위해 가람중학교를 설립했으며 만화교 다리 건설 등에도 힘을 쏟았다.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희망북구 편집위원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