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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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기행12 - 만덕사의 수수께끼와 복원 문제

  • 1997-01-27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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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적과 유물을 찾아서 짲
'97 문화유산의 해 특집─만덕사의 수수께끼와 복원 문제
‘만덕사(萬德寺)의 봄’은 찾아오고 있는가?
백이성 (낙동향토문화원장)
실로 그 얼마나 긴 세월동안 이곳이 황폐하게 버려져 왔던가?
1997년은 문화유산의 해.
‘민족의 얼 문화유산 바로 알고 바로 찾고 바로 가꾸자’는 취지대로 우리 고장의 문화재로서 부산에서 하나 뿐인 고려시대 절터 만덕사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본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만덕사. 고려 선찰(禪札)로서 주변에 차밭골이 있어 그 지명과 차나무가 전해오는 만덕사.
폐사된 지 4∼500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덕사의 금당지(金堂址)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는 사이로 만덕 제1터널에 진입하는 도로를 내면서 처음으로 동아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학술적인 지표(地表)조사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개발의 논리 앞에서 문화재 보호는 뒷전으로 밀려 났던 시절, 만덕사지(萬德寺址)도 만덕터널 진입로 공사로 절터의 목부분이 잘리는 수난을 당하면서 겨우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될 수 있었다
1차 발굴조사의 성과
(1990년 10월 8일∼11월 31일)
향토지 ≪낙동강사람들≫ 제4호(1989. 12. 발간)에 ‘만덕사의 봄은 오는가’ 특집을 다루면서 국내 각 언로보도기관에서도 만덕사의 중요성을 집중 보도하게 되었고 드디어 부산시 당국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시립박물관에서 발굴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1차 발굴 평가에서 만덕사 건립연대가 통일신라기에서 고려초기로 밝혀졌고, 금당(金堂)의 규모가 범어사 대웅전의 4배에 가까운 대규모로 확인 되었으며 금당지 석축축대의 웅장한 규모 분석과 석불을 안치하던 대형 팔각좌대석(八角坐臺石)이 발굴되어 만덕사의 거대함을 증명해주었다. 그리고 기비사(祈毗寺) 명문기와가 나와 옛 만덕고개 기비현(其比峴)과의 연관성과 만덕사와의 관계가 연구과제로 대두되었다
2차 발굴 조사의 성과
(1996년 9월 20일∼12월 31일)
1차 발굴을 한 금당지의 앞 쪽 서편 마당에 대한 2차 발굴을 고대하던 중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북구청에서 향토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96년 3,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시립박물관에 의뢰,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2차 발굴에서도 만덕사가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찰의 기와 지붕 용마루 좌우 끝에 장식되었던 대형 ‘치미’였는데 치미는 우리말로 ‘망새’라고 하며 목조건물 지붕의 기와 장식품으로 고려 중기까지 성행하였고 조선시대 지붕에는 거의 없어진 양식이라고 한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물 4가지 중에 경주 황룡사 절터에서 파편으로 출토되어 복원한 치미의 높이가 182㎝로서 이번에 만덕사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치미 파편들도 복원하면 그 규모가 황룡사 치미와 비슷할 만큼 대형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덕사의 수수께끼
만덕사는 이처럼 국내에서 엄청난 규모의 큰 사찰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는데 그 규모에 비하여 절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① 만덕사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節要)≫에 공민왕 때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가 유폐되었던 절로 나와 있는데 만덕사의 위치나 내력에 대한 기록은 왜 없는지?
②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없고 ≪동래부지≫의 산천(山川), 불우(佛宇) 조항에도 인근의 다른 사찰의 기록은 다 있는데 만덕사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양산군지≫와 ≪경상도지≫에도 만덕사 명칭은 왜 보이지 않는지?
③ 만덕리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조선시대 낙동강 하류의 물목으로서 크게 번창했던 구포의 행정구역인 양산군 좌이면에 소속되어야 하는데 동래쪽에서 산 너머 동네인 만덕리를 왜 동래부 서면에 편입시켜야 했는지?
④ 만덕사지 1차 발굴에서 기비사 명문기와가 나왔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만덕고개 기비현과 연관되었다면 기비현은 기록에 나오면서 기비사는 왜 기록이 없는지?
⑤ 만덕사 금당지의 석축 축대는 웅장한 규모로 보존되어 있는데 당간지주는 한쪽이 없어졌고, 금당지 서쪽 논빼미에 3층석탑 2기가 해체, 방치되어 왔으며(그래서 주민들은 그 논빼미를 탑빼미라고 부른다), 대웅전 중앙에 있어야 할 팔각좌대석이 서편 외곽 땅 속에 파묻혀 있었고 기둥을 받치는 지주석 등 석재가 무엇 때문에 모두 동강 나서 땅에 파묻혀 있었는지?
만덕사의 복원 문제
만덕사 금당지는 1차, 2차 발굴조사를 끝내었고 이제 임시법당이 들어선 자리가 3차 발굴대상지로서, 이곳을 발굴하려면 법당을 옆쪽 공터로 옮겨놓아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만덕폐사지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박혜명 주지스님은 만덕사의 실체를 밝히겠다는 큰 발원으로 반경 500m 이내의 논과 밭 등지에 묻혀 있을 많은 유물들의 발굴작업을 자체적인 노력으로 추진하기 위한 모체로서 사찰 복원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그리고 만덕사 복원추진위원회가 1차 발굴 조사 후 결성되어 부산·경남을 위시하여 서울 등 전국에서 학계, 문화·예술계, 실업계, 신도 등 1천여 명이 참여하여 만덕사의 복원을 촉진하고 나섰다. 당국에서도 문화재를 바로 알고, 바로 찾고, 바로 가꾸기 위한 취지를 살려 앞으로도 계속 만덕사의 복원과 역사적 실체를 찾는 사업에 행정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