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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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토 문 화 기 행 ⑮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금정산성

  • 2001-08-27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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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金井山城)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고당봉 정상에서 남쪽 상계봉에 이르는 주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이어져 있는 산성은 성곽(城郭) 따라 큰 봉우리들을 끼고 있어 천혜의 요새(要塞)로 손꼽히는 곳이다
금정산성이야 말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요, 뛰어난 경관을 품고 있는 곳이며, 시민들이 쉽게 접근 할수 있는 등산로로서 금정산의 진면목(眞面目)을 나타내 주는 존재요, 실체인 것이다

산성의 축성 연대

금정산의 상징적 존재인 산성은 과연 언제 쌓아 올린 것일까?
최초의 축성 연대는 알길이 없으나 현존하는 산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다
조선 숙종 29년(1703년) 임진왜란 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667년 현종이 통제사로 임명된 이지형(李枝馨)을 불렸을 때 왜구(倭寇)의 침략을 방지하는 계책을 강의(講議)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동래의 금정산성은 형세가 뛰어나며 그 기지(基址)가 완연하여 이제 만약 보수하기만 한다면 보장 될 수 있는 터전이 되겠습니다」 는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면 1703년 이전에 벌써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축성 연대는 기록이 전해 오지 않아 알수가 없다.
오늘날 자취를 남기고 있는 금정산성은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의 주청을 조정에서 받아들여 축성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었고 1903년에 준공을 보았던 것이다
이때 완성된 성은 둘레 90,011보(步), 높이 15척(尺)에 동·서·남·북 성문을 둔 방대한 규모였다.
그러나 성의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성의 높이가 낮아 1707년 다시 동쪽의 제4망루에서 서문을 잇는 둘레 5,643보(步)의 중성(中城)을 쌓고 부대시설의 정비를 하였다
그 후 축조의 기록을 보면 1807년(순조7년) 동문을 신축하고 이듬해 서문, 남문, 북성루 세문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1824년(숙종24년) 이곳에 별장을 배치함으로써 산성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금정산성은 신라시대 최초로 축성을 한 근거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산성의 4대문 가운데 동·서 양문 성벽에서 신라의 축성기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금정산성은 신라때부터 침략을 일삼았던 왜구의 침력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 할수 있다

산성의 규모와 시설

0현재 산성에는 동·서·남·북 4대문이 있고 4개의 망루(望樓)가 복원되어 잇다. 그 외에 고당봉 정상쪽, 장골봉정상, 파류봉정상에 망루가 있었던 유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성내에는 당시의 시설이 남아있지 않으나 산성마을에 좌기청 6간, 좌우 행장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1간, 내동헌3간, 별정청 4간과 그 외에 장대(將臺)중군소, 교령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설치 되었던 기록이 전해 온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도훈도, 군치, 문직등의 직책을 맡은 관리와 군병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국청사 해월사, 범어사 사찰의 승려들이 수비케 하였다.
산성 성벽의 길이는 17,337㎞이고 성곽의 높이는 1.5m∼3m 가량 되며 성내 총멱적은 8213㎢(약 250만평)에 이르고 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