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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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29 - 구포지역 민속신앙의 유습(遺習)

  • 1998-10-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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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이 성 (낙동문화원 원장)


구포(龜浦)지역은 예로부터 물을 배경으로 한 수로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던 곳으로 고대 원시신앙의 유습과 유적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것은 구포가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 강 하구지역의 중심세력이 있었던 곳이며 제사를 행하던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구포지명의 ‘거북 구(龜)’를 신(神)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조선시대 구포나루터의 공식지명인 감동진(甘同津)의 유래에도 신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장 민속신앙의 유습은 구포출신 민속학자인 손진태(孫晋泰)선생이 일제시대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마을의 큰 잔치였던 별신굿과 솟대와 장승신앙 그리고 알터바위의 신앙 등이 있다.


구포의 별신굿


낙동강 수로(水路)교통의 출발지였던 구포지역 나루터의 이름은 감동진(甘同津)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정부에서 받아 들인 조세(租稅)곡물과 물품을 쌓아 두는 남창(南倉)이 설치되어 감동진 나루에는 공물선, 상선, 어선 등이 많이 드나들었고 강변의 장터는 크게 번창하였다.
우리 고장에 전해오는 민속의식이 별신굿이다. 구포지방의 별신굿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에 구포출신의 손진태(孫晋泰)씨 등 민속학자들 사이에 많이 연구되어 왔으며,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간행한 『석전(釋奠), 기우(祈雨). 안택(安宅)』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구포에서는 매년 혹은 격년(隔年)으로 별신굿을 지낸다고 되어 있다. 만약 별신굿을 하지 않으면 마을에 화재(火災)나 수해(水害) 또는 그 밖의 재앙(災殃)이나 질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별신(別神)의 별(別)은 마을을 뜻하니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란 말이다.
별신굿은 여러 사람의 무녀(巫女)가 맡아서 하는데 “앞 당산(堂山) 골목이 남당산(男堂山), 여당산(女堂山) 님(主) 제물(祭物)을 많이 잡수시고 동네의 집집마다 부귀공명(富貴功名)이 있게 해 주시고 가뭄도 홍수(洪水)도, 없으며 잡귀(雜鬼), 잡신(雜神)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마을을 지켜주시라”는 뜻의 사설(辭說)을 외우며 춤을 춘다는 것이다.
별신굿은 당산제(堂山祭)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안정(生活安定)과 재화방지(災禍防止)를 위한 것으로 한해의 성사(盛事)이며 굿의 결과로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이 초래되고 재앙(災殃)을 막자는 소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겠다.


솟대와 장승 신앙


옛날 구포에서는 별신굿을 할 때 먼저 산신(山神)을 위하고 다음에 동구(洞口) 앞에 세워진 솟대와 장승을 위하는데 제전 3일전부터 솟대와 장승의 주위를 청소하고 황토(黃土-일명 禁土)를 뿌리고 금줄(禁繩)을 이들의 신체(身體)에 돌려 묶어서 부정(不淨))을 막기 위해 그 앞에 제상(祭床)을 차리고 제물(祭物)을 갖추어 동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무녀(巫女)가 빌게되어 있으며 이것도 같은 시간에 솟대와 장승 양쪽을 향하여 행해졌다고 한다.
구포에서는 동네 입구에 솟대가 있고 장승이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의 이정표(里程表) 역할을 하는 장승을 솟대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인식하여 정초(正初)에 마을굿(지신밟기)을 할때도 금줄을 치고 풍물을 울리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솟대의 유래


신에 대한 제사는 고대에 있어서 『소도(蘇塗)』라고 불리우는 성역(聖域)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구포의 소도는 일찍이 구포 출신의 민속학자(民俗學者) 손진태(孫晋泰)선생의 ≪조선민족문화(朝鮮民族文化)의 연구(硏究)≫ 중의 ‘소도고(蘇塗考)=솟대고’에서 구포의 솟대(蘇塗)가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고 사학자(史學者) 김상기선생도 ‘구포소도고(龜浦蘇塗考)’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이제는 구포에서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소도의 성격을 고찰하여 보면 소도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지 위지 한전(三國志 魏志 韓傳)에 나온다. 또한 후한서 마원전(後漢書 馬援傳)과 진서, 사이전 (晋書, 四夷傳) 통전(通典)등 중국측의 기록에만 나오고 그 뒤의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소도는 삼한(三韓)시대 고유의 것이며 불교문화가 들어 온 삼국(三國)시대 이후는 중요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습(遺習)은 민속(民俗)으로 전하여 많이 변모되긴 했으나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말한 여러 문헌(文獻)을 통하여 소도는 별읍(別邑)이라는 성역(聖域)이었으며 이 성역속에서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단 신간(神竿)이 있었고 제사에 온 부족(部族)이 모였으며 천군(天君) 또는 군장(君長)이라는 사람이 제사를 집행하고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음주가무(飮酒歌舞)를 행하였다고 되어있다. 위에서 본 소도의 여러가지 요소(要素)는 현재 구포동을 비롯한 옛 삼한(三韓) 땅의 여러 마을에 동제(洞祭)나 신간(神竿) 등의 유속(遺俗)과 함께 당산나무가 당집으로 남아 있어 내용과 형식에 많은 변화는 있었을지라도 꾸준히 오늘까지 이어져 절멸(絶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목조신간 즉 솟대에는 여러가지 명칭이 있으니 목조소도(木鳥蘇塗), 솟대, 솔대, 소주, 소줏대, 포줏대, 거릿대, 갯대, 수살이, 수살이대, 수살목, 액(厄)맥이 등이 그것이다.
일시적 신간에는 일시신간(一時神竿), 볏가리, 화적(禾積), 화간(禾竿), 보리볏가리, 풍간(風竿) 등의 이름이 있다.
솟대와 장대에는 왼새끼줄이나 먹줄선으로 용틀임을 하거나, 장대 자체로 용틀임처럼 비틀려 꼬인 나무를 일부러 골라 쓰기도 했다. 또한 시냇물을 건넌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내어 세움으로써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것등은 솟대와 농경문화의 관련성을 나타내 준다.
솟대에 올려지는 새는 오리, 기러기, 해오라기, 까치, 까마귀 등이 있는데 오리 종류가 대표적인 것이다.
철새류인 오리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 준다거나 홍수를 막기도 하고 화마(火魔)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등 역할을 해내는 새로서 종교적 의미가 부여 되어었다.
오리가 갖는 특성으로는 물새, 철새, 다산성(多産性)을 들 수 있다.
물새로서의 오리는 물위를 떠다니고, 잠수할 수 있는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오리는 비와 천둥을 지배하는 천둥새의 속성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는 비를 가져다주는 농경 보조신으로 정착되어 있다. 그리고 오리는 1년에 300~360개까지 알을 친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속담은 흔히 남의 것을 떼어먹고 사라졌을 때 쓰는 잘못된 표현인데 이는 오리의 다산성을 나타내주는 말로 보는 것이 옳다.
구포에는 강변의 구장터 근처에 1920년대까지 솟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


장승의 유래


구포에는 장승도 있었다.
구포의 장승에 대하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에 보면 1930년 여름에 저자인 손진태선생이 구포의 무녀(巫女) 한순이(韓順伊)로부터 들은 말을 기록하고 있다.
즉 동구(洞口) 앞에 세워진 남녀 한쌍의 장승은 이정표(里程表)로 생각하지 않고 소도(蘇塗)와 같이 잡귀(雜鬼), 잡신(雜神)의 침입을 막아 한마을을 지킴으로써 그 역임(役任)을 삼고 매년 혹은 3년마다 정월 중에 무녀(巫女)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동네굿(속칭 별신굿)때에는 여러 신(神)중 주로 산신(山神)을 위하고 다음에 소도와 장승을 위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 개인이 수시로 이들에 대하여 금줄을 치고 제물을 차려 병이 낫기를 비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구포의 장승에 대하여 구포 출신 민속학자 손진태선생의 기록이 있고 또한 구포의 무녀(巫女)의 증언에도 동리 입구에 있는 남녀 한쌍의 장승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위치는 옛날 대리동네 남쪽 입구인 비석골 언덕 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