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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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1 - 금정산성의 서문(西門)과 남문(南門)

  • 1998-12-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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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금정산성(金井山城)은 동해바다를 앞에 둔 금정산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를 빨리 발견하여 이에 대처하고외부와 단절된 채 천험(天險)을 이용, 지구전을 계속하려는 의도에서 쌓은 성이다.
금정산성은 산기슭에서 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용틀임처럼 휘감고 여러 개의 계곡을 돌아 정상 가까이 이어진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산세가 급준하고 기암괴석이 많고 수목이 울창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산성은 성벽과 문 등 많은 유구를 남기고 있으며 석축 둘레의 길이가 17,337m이고 성벽의 높이는 산능선에서 1.5m에서 5m 가량이며,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인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서 전략적으로 요긴하게 축조되어 있다. 또 이 산성은 정방위는 아니지만 동서남북 적당 거리로 출입문이 나 있고 구릉엔 7개의 망루가 세워 져 전망대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언제 쌓았을까

금정산성은 언제 축성 되었는지 문헌상으로 기록은 없다. 고대 부터 동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가 침입 하였던 사실을 미루어 보아 신라때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제1권 금정산성조를 보면 원래 신라시대 부터의 산성이라는 사실은 이 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신라시대 축성한 근거를 찾아 보면 산성의 4대문 가운데 동서 양문은 고려,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다시 축성된 산성

1701년(숙종27) 11월 경상감사 조태동이 좧동래는 해방(海防)의 중요한 고장이며, 적이 처음 발 딛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 조각의 성도 없이 심히 소홀한 지경이니 금정산에 축성하기를 청한다.좩고 하며 이에 숙종이 동의하여 성축의 뜻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축성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어 1703년에 준공을 보았다. 완공된 산성은 둘레가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이 성은 성가퀴가 낮고 허름할 뿐 아니라 재력만 낭비한 꼴이라는 비난이 일어났다. 단 시일에 광대한 축성을 행하여 조잡하였던 것 같다.
1707년(숙종33)에 이 산성의 주위가 너무 넓으므로 이에 관리가 곤란하다고 하여 당시 동래부사 한배하가 동쪽의 제4망루에서 서문을 잇는 5,643보의 중성을 쌓고 부속시설을 정비하였다. 또 1806년(순조6)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그간 관리가 소홀하여 퇴폐하였다 하여 조정에 알리고는 역사를 일으켜 1807년에 동문을 신축하고 이듬해 서·남·북성루 세문을 완공하였다. 1824년(순조24) 동래부사 이규현이 이곳에 별장을 배치함으로써 동래부의 피난 겸 항전성으로써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 당시 산성 길이는 32리였으며 그때의 유지가 바로 현존하고 있는 산성이다.
현존 성내에는 당시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지 않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좌기청 6간, 좌우행장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 교련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있었으며, 그 중 산성창에는 미곡 2천석과 백목 56동을 비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도훈도, 군뇌, 문직 등의 직책을 맡은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던 것이다.
숙종조에는 산성내에 있는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병 각각 1백 여명과 범어사의 승병 3백 명으로 수비케 하고 동래, 양산, 기장 세읍에 있는 암쪾사찰 승병 수천명으로 작대(作隊)를 편성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 방어에 임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동래부지>>(1740)의 군총조에 포함되어 있는 승군 작대는 316명이다. 1703년에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작대의 승영(僧營)으로 기능을 하였던 곳이였다. 그렇다고 볼 때 이곳 국청사는 임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 작대의 사령부격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좧金井山城僧長印좩이라는 글이 새겨진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어 호국 영령의 상징인 증거물로써 스님들의 구국의 뜻을 말해 주고 있다.
금정산성은 일제 침략기에 들어와 산성의 군, 관아 건물은 파괴되고 무기 또한 몰수 당하였다고 한다.


금정산성 현황(사적 제215호)

금정산성의 복원된 과정을 살펴보면, 1972년에 동문과 남문이 건립되고 1973년에 서문과 홍현수문이 건립되었다.
1976년에 동문과 남문의 번화와 낙뢰로 와해된 망루가 복원 되었다. 그후에도 이 광대한 산성을 계속 보수하여 1978년에 동문여담과 좌우협문 2개소를 해체 복원 하였으며, 성곽 계단을 교체하고 서문 수로를 보완 보수 하였다.
1979년에 제1, 2, 3, 4망루 건물의 복원과 성곽 보수를 하였고, 1980년에 야문을 복원하였다. 1983년에 제2망루에서 309m 성곽을 보수 하였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제4망루에서 서문으로 축성된 중성 성곽 일부인 500m 복원하여 계속하고 있다.
이에 복원된 산성의 모습과 그 현황을 우리 고장과 연관된 남문을 서문을 고찰 해 본다.


서문(西門)

서문은 네 성문 중 규모와 형태가 잘 갖추어진 대표적인 성문이다. 다른 성문에서 볼 수 없던 시설로 좌우에 적대(敵臺)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한 장소로서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대를 견고하게 석성한 것으로 높이가 5m가량 되며 1m가량 상단에는 전돌로 쌓아 8∼9개의 타구(총구멍)를 뚫어 놓았다.
산성마을에서 흘러 내려오는 금성천이 성내로 지나고 있다. 성내는 금성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3개의 아치형인 홍현수문을 설치하였다.
수문 위로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여장 통로를 마련하여 놓았는데 성내의 물을 조절하는 시설인 가는 물줄기를 설치하여 성내의 물을 빼내는 은구(隱構)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南門)

남문은 동래를 향하여 남향으로 서 있다. 돌로 높이 쌓은 육축 가운데에 아치형 문을 내고 그 위에는 장중한 누각을 세웠다. 아치형 문의 높이가 5m, 너비 2m, 두께가 4m로 아치에는 두짝 나무문에 철엽을 달아 놓았다. 누각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목조 건물이며, 산성의 정문으로서 위엄을 한껏 갖추었다. 남문은 성 높이가 지표보다 높은 곳까지 육축 되었으며, 이 부근에는 가야시대의 경질토기편이 수집되어 옛날부터 가야 사람들이 금정산록에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문 앞에 큰 바위가 있는데 용이 움추려 앉아있는 형상이라 용바위라 불렀다.
남문 앞에는 토속음식을 파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을 예로부터 만덕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재 남문은 1972년 복원 당시 부실했던 분야를 보완하기 위해 완전 해체하여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장골봉의 석문(石門)

고당봉에서 서쪽으로 성벽을 따라 4㎞ 능선길을 가면 암문이 파손되어 있고 금곡 물래재를 지나 15분쯤 올라가면 울창한 수림에서 벗어나 기암괴석들이 서로 다투듯이 서 있는 마지막 능선으로 치켜 오른다. 길게 이어졌던 능선이 갑자기 단절된 듯이 절벽처럼 아래편으로 쏟아진 장골봉(494m) 아래에 위치한 망루 터에 이른다.
이 망루는 오묘한 지형을 이룬 곳에 있다. 바위들의 단애 위에 성곽이 석문을 U자형으로 절곡하면서 망루를 짓고 그 주위를 성벽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기능의 위치로는 더할 나위 없는 명당 자리이다. 10여평의 자리에 돌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문은 좌우의 돌담을 잃고 출입문만 홀로 서 있다. 석문(세로 1.5m×가로1m)은 석조로서 양편의 기둥 아래 위로 둥근 홈이 4개 파여 있고 밑에서 45㎝에는 정사각혁의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는 문지두리홈과 문빗장홈이 있어 문을 걸고 잠근 것을 알 수 있다.그 주위에는 기왓장이 흩어져 있어 4간 누각의 지붕은 성벽 밖으로 펴져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망루에서 서쪽은 낙동강, 북쪽은 고당봉, 동쪽은 제4망루와 동문 너머 멀리 동해가, 남쪽은 파류봉 망루가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금정산 장골봉에 돌보는 이도 없이 형편없이 버림받고 외로이 서 있는 석문.
외롭게 버려둘수만은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이 석문은 오랜 세월동안 홀로 비바람을 이겨오고 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