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이동

가 을 단 상

  • 2001-09-27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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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난 무척이나 행복하다. 설겆이를 하며 창 너머로 올려다 본 상계봉자락에 포근하게 내려 앉은 안개와 상계봉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하얀 뭉게구름을 보며, 아! 가을이구나, 갑자기 가슴이 벅차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 탓에 더욱 더 가을이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얼른 설겆이를 마치고 고향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린시절 내고향 가을 들녘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서 마침 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에 우린 한참동안 어릴적 뛰놀던 고향으로 30년을 거슬러 달려갔다.
이른 아침 눈을 부비며 소를 몰고 뒷동산으로 가는 길에 풀벌레 소리와 빨갛게 익어가는 찔레를 보며 구수한 벼 익는 냄새에 내 눈치를 살피며 긴 코로 냉큼 벼를 한 웅큼 삼키는 누렁이 엉덩짝을 차알싹 때리던 어린 소녀가 눈에 선하다.
우리집 누렁이는 덩치에 비해 너무나 순해서 어린 꼬마인 내가 똑바로 눈을 뜨고 노려보면 커다란 왕방울같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돌린다.
참 잘 생긴 우리집 재물 1호인 누렁이는 해마다 송아지를 낳아 우리 삼남매 학비에 커다란 보탬이 되어 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장을 들고 누렁이가 풀을 뜯고 있는 산으로 마중을 간다. 누렁이가 어디 있는지 보고나서 개암나무 열매랑 빨갛게 익은 망개를 따 먹으며 친구들과 공기돌 놀이를 하던 저수지.
넓다란 바위에서 숙제장을 펼쳐놓고 바로 누워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의 맑고 푸르름에 눈이 부시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왜이리 가슴 찡하게 그리워지는걸까?
가을 들녘의 터줏대감 허수아비도 보고 싶고, 앞마당 가득 빙빙 돌던 빨간고추잠자리도 잡고 싶고, 논두렁가에 허드러지게 핀 노오란 들국화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도 꺾고 싶고, 고목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홍시도 따먹고 싶고 옆집 담 너머로 가지가 꺾어질 듯 많이 달린 무화과도 따먹고 싶다.
아! 마음 만으로 달려간 30년 전의 고향마을에 이번 주말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엄마의 어릴적 추억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올 가을엔 기차를 타고 마음껏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
박필순 / 만덕2동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