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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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맛 - 겨울철의 영양보고(寶庫) 김장 배추 고갱이 한입에 즐거웠던 잔치김장은 예로부터 우리민족의 가장 중요 월동준비의 하나였다. 〈동국세시기〉10월초에는 「서울 풍속에 무 배추마늘 고추 소금으로김장을하여 독에 담는다. 여름의 장 담그기와 겨울의김치담그기는 민가에서 1년중 중요한계획」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고추가루를 넣어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 고추가 국내에 유입된 이후였으며 그 전에는 소금과 젓갈등으로만 김장을 했다. 그리고 「김장때는 아홉방 부녀가 다나온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좀처럼 다니지 않던 규중처녀도 김장때에는 나온다는 말로 김장의 중요성을 대변한 말이며 「김장은 반 양식」이란 말도 있는데 오랫동안 싫증을 안내고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 김장은 아낙네들의 품앗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한옆에 소금에 절여 놓은 배추를 깨끗한 물에 씻어 소쿠리에 건져놓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파와 무를 썰고 마늘을 빻고 고추가루를 젓국에 재워놓는다. 막상 배추 버무리는 작업이 시작되면 저고리 소매를 걷어부치고 빨간 양념을 배추사이사이에 알맞게 끼워 넣는다.김장을 도와주는 아낙네들의 흥겨움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모든 동네사람들이 한사람씩 이들의 입을 거친다. 누구는 어떻더라며 흉을 보고 깔깔댄다. 아이들도 덩달아 신난다. 배추고갱이 한입 얻어 먹으려고 김장마당을 기웃댄다. 점심때는 출출했던 아낙네들의 입맛을 돋구고 버무린 김치를 찢어 뜨거운 밥에 걸쳐 먹으면 그 매운 맛에 입안이 얼얼하다. 또 김장김치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농가월령가〉(1816)에는 무김치 배추김치 젓국지 장아찌 등 4종에 불과했으나 〈조선요리 제법〉(1930)에는 9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배추김치 동치미 깍두기 총각김치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김치의 장점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오랜세월동안 겨울철 김치는 한국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부식으로 신선한 채소 섭취가 불가능한 겨울철에 결핍되기 쉬운 비타민A, 비타민C, 비타민 B군 등을 보충하는 역할을 해왔다. 또 익는 동안 생성된 유기산은 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섬유질은 변비를 예방하는데 도움을 준다.우리의 건강을 지켜왔던 김치. 올 김장은 온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함께 담아보는 것이 어떨까? 1997.11.25 조회수 : 692
- 우봉문학상 수상 수필가 최해갑씨 (북구 화명동 출신)『일상생활에서 흔히 그야말로 뜻밖의 일이 생겼을때 감탄하는 말로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일이다" 고 말하는데 이번 제가 우봉 문학상을 받게 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14일 제10회 우봉 문학상을 수상한 수필가 최해갑 (74. 부산 북구 화명동 출신) 씨는 오늘과 같은 영광을 입게 된것은 남은 여생을 오로지 문학 활동에 전념하라는 배려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5년에 교단에 선후 교육에 힘써온 교육자로서 평생을 헌신해 오면서 또한 생활 가운데서 보고 듣고 느낀 진실을 틈틈히 적어 온 수필가이기도 하다. 최씨는 지금까지 『꿈과 구름과의 대화』(68년), 『곡예인생』(76년), 『육십령고개』(84년)등 총 3권의 수필집을 냈는데 언제나 찬찬하고 조심성 있는 성격이 그대로 글에 나타나 있다는게 한결같은 평론이다. 현재 낙동문화예술인 협회 고문이자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원으로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하고 있다. 1997.11.25 조회수 : 802
- “50여년을 풍물과 함께한 삶” 낙동민속보존회 고문 손 운 택씨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풍물배워 우리고장의 민속놀이를 전국 무대에 펼쳐 보는게 소원풍물패의 상쇠로서 평생을 살아온 손운택(孫雲澤)씨. 구포지역에서 태동한 낙동민속보존회의 사범으로서, 고문으로서 회원들을 지도하기 시작한것은 80년대말, 즉 1989년도.. 평생 전국을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돌면서 다니다가 부산에 오게 된 것이 80년대 들어서였다. 그리고 1987년도에 구포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북구지역 구민체육대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었는데 대회의 가장 신명나는 경기는 우리소리,우리가락을 뽐내는 동 대항 풍물경연대회였다.시장이 있는 구포1동에 살게 된 손운택씨는 체육대회장에서 구포1동 풍물팀과 만나게 되어 그들을 잠깐 지도해 주었는데 당장 효과를 발휘하여 풍물경연대회 1등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때 구포의 젊은이들에게 손운택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어 조직된 것이 북구민속보존회.손운택 선생을 사범으로 모시고 우리 고장의 민속단체가 이렇게 정식 출범한것이 1989년도였다. 그 뒤 우리고장의 전통문화단체인 낙동향토문화원과 보조를 같이하여 회 명칭도 낙동민속보존회로 재출발하였다. 그리고 북구지역 문화축제인 낙동민속제가 1993년 태동되면서 지역 전래의 고유민속인 구포대리 지신밟기, 구포 장타령, 그리고 감동진 별신굿을 재현 하는 등 평생을 쌓아온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풍물패의 상쇠로서, 구포대리지신밟기의 선소리꾼으로서의 역할을 거침없이 해내는가 하면 구포 장터놀이에서 각설이 차림에 장타령을 구성진 가락으로 뽑으면서 깡통을 두드리며 흥을 내는 모습을 보면 민속인으로서 타고 난 팔자임을 느껴지게 한다.이처럼 손운택씨는 평생 몸에 베어온 풍물의 가락을 후진들에게 전수시켜 대를 잇게 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낙동민속보존회의 고문으로서 역할을 성심성의껏 해내고 있다.풍물과 함께 살아온 손운택씨의 태생지는 경북 월성군 안강읍 금계리이다. 해방이 되던해인 1945년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집에서 소달구지를 몰던 큰머슴 김정달씨에게 꽹과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전통의 지신밟기 가락과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어릴적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오자 큰형과 가출하여 객지를 떠돌게 되었다. 가는곳마다 풍물패를 만들어 상쇠로서 패를 이끌어 17세에 안강 강서에서, 19세에 영일군 기계면에서, 군 입대를 하여 사단에서, 군 제대후 강원도 장성광업소에서, 29세에는 안동군 길암면에서 상쇠잽이로 이름을 날렸고 경주에 돌아와 신라문화제에서 입상하고 강원도 철암선 철도공사장에서도 풍물을 놓지 않았다. 45세에 안동군 길암면에 다시 들어갔다가 3년후 47세때 여동생이 있는 부산으로 오게되었고 부산의 아미농악에도 동참하였다. 1989년 구포와의 인연으로 낙동민속보존회의 사범으로서 우리 고장에 정착하게 된것이다.13세부터 진갑을 넘긴 오늘까지 50여년을 가는곳마다 풍물과의 인연으로 생의 보람을 느끼고 살아온 상쇠잽이 손운택씨. 이제 그 뿌리를 우리 고장에서 내리고 있는것이다.우리 고장의 전통 민속놀이인 구포대리 지신밟기가 금년 부산시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획득하면서 손운택씨가 어려운 경제적 여건과 인간적인 갈등속에서도 전통문화를 일깨워왔던 그 순수한 염원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이 고장에 자리잡은지 어언 10여년! 이제 다시 출발하는 마음으로 우리 고장의 전통민속놀이를 전국의 무대에서 재현 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손운택씨는 오늘도 바쁜 일정속에 하루를 보내고 있다. 1997.11.25 조회수 : 799
- 11월 복지의 달 -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통합 보건사업팀 ● 북구보건소 가족 보건계 (통합보건 사업팀)복지사회 구현위해 능동적 활동전개구민 건강 책임지는 의료봉사 산실4명으로 구성된 북구보건소 통합보건사업팀은 환자를 돌보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더불어사는 복지사회 구현을 위해 능동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생활이 어려운 영세주민을 대상으로 거동불능·불편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진료와 치료를 전개하는 한편 사회복지개발원의 이동목욕차량의 지원을 받아 의료서비스를 실시하여 보건복지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 65세 이상 독거노인 403명에 대하여 기초조사 결과 건강에 이상이 있는 분들은 의료기관과 연계로 정밀진료를 의뢰하였고 자원봉사자를 통한 가사봉사와 정서상담을 펼쳐 보건복지의 의미를 다시한번 인식케 하였다. 이외에도 관내 경로당 77곳을 주 2∼3회 방문하여 건강검진과 체조를 실시하여 무료한 노인들에게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97년 연중사업으로 저소득 지역을 대상으로 가정환경 기초조사를 실시한후 관리 대상자를 선별하여 건강관리함으로써 거동불편·불능과 고혈압, 당뇨등 만성퇴행성 질환자의 건강증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의 효율적인 관리와 수준높은 교육을 통하여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에 이바지 하고 있다. 이와같이 통합보건사업팀은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더불어 함께사는 사회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구민건강을 책임지는 의료봉사의 산실로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다.봉사는 삶의 보람 - 자원봉사자 이인숙씨『봉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고 삶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나이가 들면 꼭 봉사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어쩐지 내게는 거리가 먼 아주 착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건소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결심을 굳히고 봉사의 길을 걷게되었다는 이인숙씨(39). 그가 하는 일은 간호사들과 함께 경로당, 독거노인, 거동불편환자들을 찾아가 이동목욕, 건강체조, 허리찜질등 보건서비스를 해주는 일이다. 다른 봉사와는 달리 대부분 환자들을 다루는 일이라 잘할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간호사에게 배워가며 최선을 다한 결과 그 나름의 요령도 터득했단다. 또한 요즈음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져 더욱 바쁘다. 「찾아가면 반겨주고 봉사에 감사할 줄 아는 그들은 이제 남이아니라 한 가족입니다.」이씨는 봉사를 통해 삶의 보람과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특히 이인숙씨는 봉사활동을 통해 "어머 이렇게 사는 사람도 다 있네"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하는 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번 기회에 자신과 같은 자원봉사로 삶의 보람을 함께할 뜻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사랑의 자원봉사자 모집●모집분야: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이용사, 미용사, 에어로빅 강사, 다른분야까지●홀로사는 노인, 거동이 불편한 환자, 위생이 불결한 환자, 마음과 몸이 외로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눌 자원봉사자를 구합니다.●연락처:북구보건소 ☎ 341-0117∼20 1997.11.25 조회수 : 634
-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22 - 만덕동 만덕동(萬德洞) 지명의 유래 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 원장)만덕사와 만덕고개에 얽힌 지명만덕동(萬德洞)이라는 지명(地名)은 어디에서 유래(由來)한 것일까?먼저 그 어원을 만덕사(萬德寺)라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던 절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한 만덕사의 내력은 오직 하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이른바 석기 왕자의 왕위추대음모사건과 관련된 기록 속에 나오고 있다. 이 기록들에 나오는 충혜왕(忠蕙王)의 서자(庶子) 석기(釋器)가 만덕사에 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공민왕 5년에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음모사건과 관련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문헌(文獻)에 석기(釋器)가 유폐(幽閉)되었던 절이 만덕사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절의 내력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만덕동의 큰 절터 유적과 유물들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고려사에 나오는 석기 추대 음모사건과 관련된 만덕사가 만덕동에 있는 절터라는 데에 귀착하게 된다. 그래서 만덕동의 명칭은 현재의 만덕 제1터널 입구 좌측 산쪽에 있는 사기(寺基-절터) 마을에 있는 만덕사(萬德寺)에 그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만덕동 뒷산에 임진왜란 때 만명(萬名)의 피난민이 와서 피신했다고 만덕동이라고 했다는 설(說)도 있는데 그것은 근거가 확실치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고갯길에는 도둑들이 들끓어 여기를 오르내리던 장꾼들의 물품을 털어갔는데 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넘어야 했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그 이름이 만덕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이곳 만덕사에 많은 승병(僧兵)이 운집(雲集)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만덕이란 말은 결국 만덕사와 관련하여 생긴 이름으로 넓은 절터에 만명(萬名)의 대덕(大德-스님)이 와서 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는 것이다.만덕사 절터와 관련된 지명들‘만덕사 옛 절터’란 뜻의 사기(寺基)마을은 현재 만덕 제1터널 입구 좌측에 있는 마을을 이야기한다.이곳에는 만덕사 금당지(金堂址)가 폐사된지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왔다. 그러나 금당지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장방형의 큰 바위들로 쌓아올린 대형 석축은 이 절터가 고려시대의 국찰에 버금가는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이 지역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모두 만덕사와 연관된 것이 많다. 먼저 만덕사의 안산(案山)은 비룡산(飛龍山)이다.용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비룡산은 풍수지리상 명산이다. 그리고 만덕사가 명당자리임을 나타내주는 좌청룡우백호의 풍수에 맞추어 만덕사의 서쪽 강변쪽을 가로 막고 있는 산이 용을산(龍乙山)이다.옛날 상계봉 골짜기에서 용을산 너머로 흘러내리던 물을 용의 등허리를 잘라 만덕사쪽으로 흐르게 했다는 용호골의 전설은 용을산의 주름을 자른 후 절쪽으로 흘러내렸다는 용을그렁(도랑)의 지형을 살펴보면 신비함을 느끼게한다.만덕사의 위쪽 개울가에는 차밭골이 있는데 만덕사에 선승(禪僧)들이 주석하면서 마시던 선다(禪茶)의 내력을 증명해주는 지명이다.이곳 차밭골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가 군생(群生)하고 있는데 꽃이 좋고 열매가 둥글둥글하게 열리고 있다.계곡 위쪽의 소나무 밭에는 떡매바우라는 홈이파인 바위가 있다. 이는 만덕사에서 수조(水漕)로 쓰기위해 제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돌인데 만덕사람들이 평평하게 파인 돌 모양을 보고 옛날 만덕사에서 떡매를 치던 돌이라고 ‘떡매바우, 덕전걸바우, 떡구시바우’라는 이름을 붙였다.절터였던 곳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논을 갈기위하여 논빼미 옆에 만덕사 3층 석탑 2기(基)가 허물어진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한곳에 모두어 놓았다고 이곳을 탑빼미라고 불렀다.그리고 현재의 만덕터널 앞 도로 아래쪽에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개따껄이라고 부른다. 동네아이들이 당간지주 옆에 있던 동네 당산의 포구나무 있는 곳을 갈때는 개따껄 간다고 했는대 개따껄이란 이름은 당간지주에 사찰을 상징하여 내걸던 깃대가 있는 곳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만덕사와 연관된 지명은 이곳 사기 마을 말고도 만덕지역의 곳곳에 남아있다.동래로 넘어가던 만덕고개가 바로 만덕사에서 연유한 지명이요, 옛날 만덕에서 초읍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부태고개, 불태령(佛態嶺)이라고 하는데 이 고개의 이름 속에 부처님의 모습이란 뜻이 담긴 것을 봐도 만덕사와 연관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실제 만덕사 금당지에서 정면으로 쳐다보면 안산(案山)인 비룡산이 보이고 그 비룡산 너머 정면으로 불태령이 쳐다보인다.조선시대 양산군지, 동래부지의 기록에 보면 만덕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덕천(德川) 냇물을 만덕계수(萬德溪水)라고 한 것을 보아도 만덕이란 지명이 오랫동안 전해오는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이 만덕계수가 흘러내리다가 현재의 신만덕 중소기업청이 있는 곳의 위쪽 100여 미터 지점에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웅덩이의 이름이 중시골이고 이곳에 있던 큰 바위가 중시골 바우였다.글 뜻대로 만덕사 스님들이 목욕하던 곳이라서 중시골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이 만덕 계곡물이 흘러 내리는 남산정 마을의 북쪽산에는 기와골이란 골짜기가 있다.이 골짜기의 이름을 보면 고려시대 엄청난 규모의 큰 사찰이었던 만덕사의 기와를 이곳에서 생산해서 보급한 곳으로 추정된다.절터 앞에 길게 벋어내린 능선을 길다고 진등(長丘)이라고 하는데 사기마을과 상리마을의 중간지점인 이 계곡평야에 끝이 갈린 원추형(圓錐形)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북채로 북을 친다는 북바위이며 이 계곡을 북설이라고 한다. 이 북바위의 전설도 만덕사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만덕사는 사찰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절에서 쌀을 씻는 뜨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 낙동강까지 하얗게 떠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이처럼 만덕사는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만덕동 일대의 곳곳에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고장 전설만덕고개와 빼빼영감동래 남문(南門)밖에 동래와 구포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삿자리 장사를 하며 생계(生計)를 이어가던 홀아비가 살았다.성(姓)도 이름도 없이 빼빼영감으로 통하는 이 삿자리 장사는 어찌나 여위고 피골(彼骨)이 상접(相接)하였던지 성내(城內)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이 영감이 하루는 구포장에 갔다가 여러 장꾼들과 함께 험한 만덕고개를 넘게 되었다.이 고개는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이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부터 동래부(東萊府) 관아에선 최대의 도적들 소굴이었으니, 지금 양정동(楊亭洞)의 마비현(馬飛峴=모너머고개) 화적떼도 이 무리에 비하면 문제가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만덕고개를 ‘만등고개’로도 불렀는데 만(萬)사람이 무리를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이 만덕 고갯길을 빼빼영감과 장꾼들이 구포장을 보고 동래로 돌아가면서 고개마루에 있는 주막에 앉아 잠시쉬게 되었다.이때 별안간 10여명의 도적떼가 뛰어들면서 “꼼짝마라! 움직이면 죽인다”라고 사나운 얼굴을 지으며 장꾼들을 한사람씩 묶어버렸다. 그리고 두목이 나서서 물건을 판 돈과 가진것들은 모조리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때 빼빼영감이 감연히 앞으로 나서서 도적을 향하여,“여기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나돌아 다니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될 것이 아니옵니까?”라고 애걸(哀乞)하는 어조로 말했다.그러나 도적들은 이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이놈!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하면서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더니 땅바닥 위에 쓰러 뜨렸다. 영감은 봉변을 당하고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이놈들!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면서 눈에는 살기(殺氣)가 등등하였다. 도적들의 시선이 빼빼영감에게 쏠렸을 땐 벌써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 이놈을 때리고 저놈을 밀어 넘어뜨리는 그 솜씨는 비호같이 날쌨다. 이 비상한 완력에 감당할 수 없었던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자 그는 묶인 장꾼들을 한 사람씩 모두 풀어주었다.이때 힘을 얻은 장꾼들은 다쳐서 못달아난 도적들을 잡아 동래로 가자고 했으나 그는 “우리들에게 소득이 없는 일이라면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 그 자들은 이젠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술이나 한잔 합시다”라고 하면서 술과 안주를 있는대로 다 가져오라고 주모(酒母)에게 청했다.“여러분! 이 술은 모두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 난 이야기만은 절대하지 말도록 거듭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했다.술 대접까지 잘 받은 장꾼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의 한 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아드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자 나라에서는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1997.11.25 조회수 : 1650
-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 주민 참여 확산 '21세기 북구는 녹색도시'가을의 끝 만추다. 자연은 갖가지 빛깔로 넉넉함을 잉태하고 있다. 그 몸짓은 아스라한 고향의 향수다. 길섶에 흐트러진 억새꽃이며, 개암이며 도토리도 만나보리라. 갈색 물결의 숲은 바라만 봐도 어쩐지 정이 간다. 도시 냄새가 조금 베이면 어떠랴!느긋해 질 수 있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 것을, 노을 지는 숲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벤치에 앉아 마음에 드는 시 한줄 읊조려 보자. 가끔 쓸쓸한 허무를 본다. 단풍이 묻은 황혼은 숭고하리 만큼 장엄하고 아름답다. 건조한 회색 도시의 언저리에서우리 인생의 끝 맺음도 수수한 풀꽃으로 키우다 가면 좋으련만 …■숲의 도시 북구가꾸기 운동은 주민 여러분의 참여로 이루어집니다.■참여하실 분은 기념식수 접수창구에 신청하시면 됩니다.「오는 2001년까지 1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북구청이 사상 유례없이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은 최근 인도네시아와 브라질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로 인해 숲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또 얼마전 영국,독일, 미국등지의 대도시에서도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발산되는 열을 흡수하고 대기의 역전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외없이 거대한 숲을 조성하고 있다는 언론보도에 비추어 볼 때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은 환경개선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사업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숲은 도시의 오염된 공기정화는 물론 주민정서 순화와 토사유출에 의한 재난예방,상수원의 저장공급, 목재생산등 많은 혜택을 제공해 줄뿐 아니라 생태적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숲을 조성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인 동시에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자원을 마련하는 셈이다. 이에따라 북구청은 주거중심의 지역특성을 살려 청소년에게는 꿈과 낭만을 구민에게는 쾌적함과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해 5개년 계획으로 2001년까지 10만그루의 나무를 심는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종합운영반 △홍보지원반 △녹화사업반 △주민대책반 등 4개반을 구성, 7대 과제별로 시범 사업장을 선정해 효과를 파급시켜나가고 구민 모두가 참여하는 시책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기념식수를 할 수 있도록 구청과 각동에 상담창구를 설치해 묘목 알선과 기술지원을 다하고 있다. 이밖에 숲의도시 북구가꾸기의 범구민 참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권 익 구청장이 직접 각 동별 시범지를 순회하는 시범식수를 실시했다. 이번 행사에는 각 동장을 비롯한 구의원 및 자생단체장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마을마다 1개소씩 지정된 시범식수지에서 식수희망자와 함께 나무를 심는 것으로 녹화사업의 첫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됐다. 이젠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은 30만 구민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가 관건으로 구민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된다. 이번달 “숲의 도시북구가꾸기" 기념식수에는 총 95명이 참여해 110그루를 심었습니다. 기념식수에 참여하신 모든분께 감사드리며 구민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합니다. ● 구민 기념식수 접수 창구 운영개인·가족단위의 생일, 결혼, 회갑, 돌이나 직장단체 단위의 창립일 등 각종 기념일을 맞아 1그루 나무를 심는 사업이다. 식수 희망자는 상담창구에 식수예정일 15일전까지 신청하면 되는데 식수수종이나 대상지는 본인의 희망지를 우선으로 하고 없을 경우 접수 창구에서 알선해 준다. 나무값은 수종 및 크기에 따라 다르며 대체로 저렴하게 구입 할 수 있다. 이밖에 식수일에는 수종과 일자, 그리고 식수자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무료로 제공한다.<접수창구>총 무 과 (☎309-8251) 지역경제과 (☎309-8351) 각동사무소◎ 금곡동 “벚꽃 도시로 조성"금곡동(동장 박갑술)은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과 연계해 오는 2001년까지 마을 전체를 벚꽃단지로 조성키로 했다. 우선 1차적으로 고사목 위주의 가로수 수종을 벚꽃으로 교체하고 아파트 진입로변과 이면도로, 어린이소공원등에도 단계적으로 벚꽃을 식재해 마을 전체를 아름다운 벚꽃단지로 가꾸어 나갈 방침이다. 특히 지난 10월 28일에는 금곡동 벚꽃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송영근)가 지역주민 46명으로 발족돼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금곡동은 추진위원회 중심으로 '1세대 1벚나무 심기'를 전개해 전 동민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애향심과 자긍심을 드높여 나갈 것이다.◎ 구포3동 동정자문위원 전원 기념식수 발벗고 나서 구포3동 동정자문위원회(위원장 신민웅) 위원 25명은 ‘숲의도시 북구가꾸기”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기념식수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지난 20일 구포3동 체육공원내에서 권 익 구청장 및 조일호·이종택 구의원과 함께 전위원들은 대대적인 기념식수를 전개해 벚꽃나무 27본을 심고 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표찰을 달아 참여의 의미를 돼새겼다. 또 금곡동 신금초등학교 운영위원회(위원장 김근수)에서도 11월중으로 학교내 운동장에 벚나무 20∼30 본을 심기로 하는 등 기념식수운동에 동참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이제 숲의도시 북구가꾸기는 주민 모두의 참여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1997.11.25 조회수 : 909
- 새벽 기공체조 주민호응 크다 - 우리 민족고유의 심신수련법, 양천초등학교 외 6개소에서 실시요즘 들어 사회적으로 기(氣)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지만 실제 기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 조상대대로 내려온 심신수련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氣)수련이었고, 생활에서도 ‘기가 막히다’ ‘기분이 좋다’ ‘기절초풍하다’ ‘인기가 있다’ ‘기를 탄다’ 든가‘신명이 난다’ 등 우리들은 은연중에 생명과 연결되게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침 6시, 우우우--하며 한 사람이 아닌 60여 명의 사람이 온몸을 거쳐 입으로 토해내는 소리가 운동장 앞으로 한꺼번에 터진다. 기공체조 일명 도인(導引)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몸 속 탁한 기운을 밖으로 뱉아내고 있는 중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주부와 노인들. 단학수련의 한 가지인 기공체조는 호흡(氣)을 통한 체조를 말하는데 기운을 써서 운동함으로 기혈순환을 원활히 해 탁한 기운을 밖으로 빼내 피를 맑게 하고, 나아가 몸까지 맑게 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되찾도록 하는 체조다. 북구 관내에도 이미 7개소에서 무료 기공체조를 실시해 오고 있는데 양천초등학교에서도 체조를 시작한지 3개월쯤 된다.아침 공기를 마시며 기공체조를 하고 나면 목욕을 한 것보다 개운해지고 기분까지 상쾌해진다는 것이 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소리다. 2개월 동안 해온 서군자 씨는 “육교를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신경통을 앓고 있었는데 체조를 시작한 후로는 육교도 거뜬히 오르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벌써 50대를 넘어섰지만 몸이 가벼워져 다시 젊어지는 것 같다며 건강한 웃음을 쏟아낸다. 혹자는 단학수련을 사이비종교로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을 현대화시키고 과학화시킨 것이 바로 단학이다. 기공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만 지나도 자신의 건강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한다. 척추교정, 직장인들의 만성피로 해소, 숙변·변비제거, 비만·혈압조절, 각종 부인병 해소, 수험생 집중력·창의력 개발 등 특히 심인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빠른 효과를 볼 수 있고, 경락(몸 속에 기운이 움직이는 길)을 맑고 원활하게 해주어 마음의 평화, 곧 몸의 건강을 찾을 수 있다.기공체조 강사 정인준 씨의 말을 들어본다. “7월 장마 때는 비가 오는 날에도 20-30명은 나와 체조를 했습니다.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실제 효험을 느껴, 빠지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무료로 한다는 말에 정말인가? 왜? 하고 의문스러워하는 분들도 많죠. 저희 단학선원은 건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이면 강사를 보내 운동할 수 있게 이끌어, 우리 나라 온 국민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처음엔 고통을 호소하던 분이 차츰 좋아져 건강한 생활을 하는 걸 보면 그 이상의 보람은 없죠”체조를 하고 나오는 얼굴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더 환해 보인다. 땀을 흠치며 이웃과 정다운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웃음에는 분명 건강이 넘치고 삶의 활력이 솟고 있다.●문의: 금곡 (☎ 362-6173) 덕천 (☎ 336-4142) 만덕 (☎ 334-0321) 1997.09.25 조회수 : 887
- 지하철 2호선 1단계구간 내년 9월 개통 ◇ 9월말 북구 구간 토목공사 완료 돼 ◇ 내년 3월이면 모든 공사 마무리, 시운전 들어가우리 구민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지하철 2호선이 내년 9월에 완전 개통될 예정에 있어 공사장은 8월 늦더위에도 아랑곳 없이 인부들의 몸은 분주하기만 하다. 공사장 책임을 맡고 있는 관리 소장은 우리 북구의 공사구간인 201공구에서 210공구 중 207공구까지는 공사가 완전 마무리 돼 현재 차량이 원활히 소통되고 있고, 208공구는 정차역이 없는 곳이므로 이 구역 역시 100%공사 마무리된 상태라 한다. 210공구(구남약국 앞→사상구 경계지역)는 토목공사는 다 마무리된 상태로 현재 내부공사가 70% 진행, 209공구(낙동교회→구남약국)는 9월말 토목공사 완료예정, 내부공사는 30% 진척된 상태로. 내년 3월경이면 이 구간도 내부공사, 도로포장 등 공사가 완료되어 6개월간의 시운전을 거쳐 내년 9월에 완전 개통된다고 한다. 지하철2호선 1단계(양산 호포-서면)구간 중 북구 구간에는 금곡역, 동원역, 율리역, 화명역, 수정역, 덕천역, 구명역, 구남역 8개소 정차장이 들어서 남부·북부를 잇는 맥으로 금곡로, 낙동로의 교통란이 획기적으로 해소될 것이다.또한 서면 등에서 지하철1호선과의 환승체계가 갖추어져 중앙동, 동래 방면과도 연결돼 일상생활에 한층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90년 연말부터 2호선 공사의 1단계 공사가 시작된 후로 화명·금곡지역의 아파트지구 개발과 공사가 맞물려 금곡로를 통과하는데 무려 1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가히 교통지옥이라 불릴 정도의 어려움을 구민 모두가 겪었다. 그런 가운데 구포와 양산을 잇는 우회도로 개통과 구포·냉정간 4차선 도로 확장 및 금곡로 지하철 공사의 지상구간이 완전 마무리 됨으로써 현재 교통소통은 훨씬 원활해졌다. “지하철2호선 개통은 구민들의 대중교통 이용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개통과 동시에 지하철 노선과 같은 몇 개의 버스노선은 없어지게 되고, 대신 북구 주민이 원하는 노선으로 대체되어 한층 높은 대중교통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공사관계자는 말한다. 한편 강서와 남구 수영간을 연결할 지하철 3호선도 늦어도 올해 10월 경에는 착공할 예정이다. 3호선은 2호선과 덕천로타리에서 교차하여 동래구 소재 종합운동장을 거쳐 연산로타리를 경유하게 된다. 3호선이 마무리 되는 2002년에는 동서·남북을 지하철이 관통하는 지하철 시대를 맞게 되고 아울러 지역발전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1997.09.25 조회수 : 937
- 폭력없는 안전지역 탐방 “청소년 폭력 발붙일 곳 없다" - 덕천로타리 일대 안전지역 설정, 청소년지킴이 활동 청소년 문제해결 … 청소년 상담소 야간 방범 활동 … 바르게살기 청년 분과위원회 유해 환경 정화 … 청소년 지킴이 전화상담 … ☎ 334-3000「이 지역은 폭력없는 안전지역입니다」 덕천로터리 주변에 내걸린 현수막의 문구가 이채롭다. 청소년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되는 지역을 특별관리함으로써 폭력이 발붙일수 없도록 설정한 폭력없는 안전지역(Blue-Zone)은 덕천초등학교를 비롯 구포농협, 롯데리아사거리를 포함하는 덕천로터리 일대다. 이들 지역은 평소 유해환경 밀집지역으로 청소년들의 탈선과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돼 왔는데 지금은 거리가 훨씬 밝아졌다고 지역주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해 11월 부산은행 앞에 문을 연 청소년상담소와 바르게살기 청년분과위원들의 헌신적인 방범활동 그리고 지난 8월 21일 발족된 청소년지킴이의 활약을 빼놓을수 없다. 16년동안 한결같이 청소년 선도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바르게살기북구협의회 조춘자 회장이 상담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상담소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6시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면담과 전화상담을 실시해 지금까지 100건이 넘는 상담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상담내용은 폭행, 가출, 취업, 이성문제, 가정문제들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늦기 전에 상담소 문을 두드려 달라고 조회장은 말한다. 청소년문제는 혼자서 해결될수 없을뿐만 아니라 빠를수록 문제해결이 쉬워진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바르게살기청년분과위원회에서는 100여명의 회원들이 조를 편성해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이곳 상담소에 나와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취약지를 중심으로 야간방범활동을 전담하고 있다. 청소년 선도는 물론 범인을 검거해 경찰에 인계하는 등 지금까지 220건이 넘는 활동실적이 말해주듯 청년회원들의 이 같은 노력은 법무부 소년부지원의 통계로 볼때 지난해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청소년범죄율이 1위였던 북구가 올해들어 5위로 내려가는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청소년 비행을 조장하는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역내 업소의 업주와 청년분과위원 등 59명으로 구성된 청소년지킴이는 청소년유해업소의 불법 무질서 행위를 고발함과 아울러 청소년 선도활동을 전담함으로써 지킴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북구의 중심상업지역으로 유해환경이 밀집해 있는 덕천로터리주변은 청소년 상담소와 바르게살기청년분과위원들의 방범활동과 어우러진 청소년지킴이가 있는 한 청소년 폭력은 그 뿌리를 내릴수 없게 되었다. 1997.09.25 조회수 : 863
-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8 - 구포지역명산물(名産物)에 얽힌 이야기 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 원장) … 구포다릿목에 버스가 닿으면 … 구포역에 기차가 들어오면 … 부녀자들이 차창을 두드리면서 … 내 배 사이소! 내 딸 사이소!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소! 내 딸!8·15광복을 맞고 이어서 6·25가 일어난 후 구포다리 입구에는 헌병파견대가 설치되었고 60년대에 접어들어 동편 버스정류소 쪽으로 상권을 형성하여 구포관광센타 콘크리트건물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구포 다릿목에는 그 당시 부산에서 김해, 마산 등을 지나 진해 쪽으로 가는 버스가 오르내리면서 정차하였다.이곳에 버스가 닿으면 하나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아주머니, 아가씨 등 대부분 부녀자들이 광주리에 배를 담아 버스를 따라 붙으면서 “내 배 사이소! 내 배!” 외쳐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봄철이면 새빨갛게 익은 딸기 광주리를 들고 외치는 소리가 “내 딸 사이소! 내딸!”이었다. 이러한 풍경은 구포다리 입구 뿐이 아니었다.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면 기차가 닿는 구포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차가 홈에 들어오면 부녀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차창을 두드리면서 “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이소 내 딸!”외쳐 대었다. 그래서 구포 배와 구포 딸기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명산물이 되었다.그런데 배와 딸기로 유명한 구포에는 정작 배밭이나 딸기를 재배하는 밭이 단 한평도 없었다.구포에서 생산되지도 않았던 배와 딸기가 왜 구포의 명산물이 되었을까?여기에는 낙동강 하류의 물목이었던 구포의 지역적 특성을 알게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구포 배와 딸기 생산의 역사는 구한말(舊韓末)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1908년 일본이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동양척식회사는 한·일합방 후 김해 삼각주 일대 에 수리(水利)사업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이 이주해 와서 대저 출두리를 중심으로 배나무를 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 동쪽의 기름진 땅인 삼락 유두리 일대에도 원예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딸기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배와 딸기가 구포나루에 반출되어 구포역을 통하여 전국으로 운송되어 갔다. 이처럼 구포는 생산지는 아니었지만 생산물이 반출되는 집산지(集産地)로서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자연히 붙여진 이름이 구포 배와 구포 딸기가 된 것이다.‘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소! 내 딸!’봄철에는 딸기를, 가을과 겨울철에는 배를 사라고 외치던 소리가 구포에 대한 인상을 더욱 깊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녀자들이 딸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내 딸 사소’하니까 딸(女息)을 사라는 말이냐고 웃어 주었고 ‘내 배 사이소’하는 소리를 엉뚱한 뜻으로 해석하여 외지인들이 놀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60년대만 하더라도 봄철이 되면 삼락동의 낙동강 강변 둔치에서 딸기가 익을 무렵 주말이 되면 부산시민들이 구포다리에서부터 낙동강 제방 일대에 몰려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리고 가을철이 되면 구포다리를 건너거나 구포나루에서 다니던 김해 대동행 나룻배를 타고 대동면과 경계지점인 대저 출두리의 배밭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이처럼 구포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배와 딸기가 구포를 통하여 반출됨으로써 구포배와 구포 딸기로 이름을 달렸던 시절도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지주(地主)들이 수익성이 높은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면서 그 이름도 차츰 사라져 갔다.뭔가 맛이 다른 구포 국수 - 서민들이 즐겨 먹어구포의 명산물 중에서 진짜 구포에서 생산되었던 것이 구포국수였다.3일, 8일 장이 열렸던 구포장터의 중심부에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수공장들이 죽 들어서 있었는데 공장마다 뽑아낸 국수를 장대에 꽂아 길게 널어 놓은 모습은 실로 멋진 풍경이었다. 구포 국수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 직후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값이 싸고 배를 채우기에 적합한 국수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구포국수는 다른 지역에서 만든 국수보다 뭔가 맛이 달랐다. 약간 짠 듯한, 그리고 쫄깃쫄깃한 구포국수의 맛을 딴 지방에서는 그 비방을 흉내 낼수 없었다. 그 일미(一味) 때문에 국수라고 하면 으레 구포국수를 찾았다. 이 국수를 6·25 동란 직후 구포의 부녀자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볼박스에 넣어 머리에 이고 마산에서 오는 통근열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시내에 공급해 주었다.이렇게 구포국수가 잘 팔리자 1959년 10월 구포장터에 있던 20개의 국수공장들이 구포건면(乾麵)조합을 결성하고 상표등록을 하여 국수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이후 구포국수는 여전히 생산, 판매되어 왔는데 1988년 시장에 있던 모 국수공장 주인이 구포국수를 단독으로 상표등록을 하여 다른 공장에서 구포국수 명칭을 못 쓰도록하여 소송이 일어 난 적이 있었다.그런데 재판부에서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산물로 역사성이 있는 명칭이므로 단독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구포국수는 영구히 구포의 명산물로서 그 명맥을 이어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구포지역에 2,3곳의 공장만 남아있어 그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디스토마균이 있어도 맛이 뛰어난 낙동강 잉어회낙동강 하류 지역인 구포의 강줄기에서는 예로부터 잉어와 장어가 많이 잡혔다. 그래서 여기서 잡힌 고기로 영업을 하는 요리집이 많았다. 잉어는 구워서 먹어야 진미(珍味)가 있다고 했다. 잉어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용(龍)이 되기 위해 중국 황하(黃河)의 물살이 센 용문(龍門)에 모여든 잉어가 그곳을 뛰어 오르면 용(龍)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잉어는 이마에 점이 찍혀 물러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잉어 이마에는 점이 찍혀 있다고 한다. ‘잉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말이 있듯 잉어는 물살을 거슬러 뛰어 오른다. 그리고 잉어는 온수성(溫水性) 고기로서 겨울철 얼음 밑에서도 생존하지만 봄이 되어 수온(水溫)이 20도 이상되면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먹이를 찾게 된다.여름철이 되면 차츰 수온이 높아지는 경우 37.8도까지는 능히 살지만 40℃를 넘으면 살지 못한다. 잉어의 몸 길이가 큰 것은 1m 가량이나 되며 몸은 방추형(紡錘形)으로 약간 측편(側扁)하고 주둥이는 둔한데 입가에 2쌍의 수염이 났으며 머리를 제외한 온몸은 둥근 비늘로 덮여있다. 낙동강 하류에서 잡히는 잉어는 디스토마균을 보유하고 있어 유역주민들이 잉어회를 먹고 간 디스토마나 폐 디스토마에 걸려 생명을 잃는 수가 많았다.그래도 잉어는 회를 쳐야 일미(一味)라고 하며 잉어회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그런데 잉어는 출산부(出産婦)들이 곰국을 해 먹는 보신제(補身劑)로서도 인기가 높다.부산의 7진미(珍味)에 들어가는 장어구이장어(長魚)는 뱀처럼 몸이 길고 매끈하여 뱀장어라고도 불리는데 살갗 밑에 매우 작은 비늘이 묻혀있고 지느러미에는 가시가 없는 고기이다. 다른 어류와는 달리 50년이 넘도록 사는 뱀장어는 스테미너를 돋워주는 탁월한 영양가 때문에 낙동강변의 어민은 물론 부산시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가격이 비싼 고급 식품인 뱀장어는 알을 낳기 위한 산란(産卵) 여행을 위해 9월 하순경부터 낙동강의 혈수역(穴水域)인 구포∼금곡 주변으로 몰렸다. 낙동강 상류쪽의 늪지대나 하천, 논 속에서 6년∼12년을 자란 뱀장어는 성어(成語)가 되어 여행을 시작한다. 염분(鹽分)이 없는 민물 속에서 반평생을 보낸 뱀장어가 산란장(産卵場)인 깊은 바다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체질을 바꾸어야만 된다. 이 고통스러운 훈련장이 바로 구포 일대의 낙동강이다.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올라 왔던 이곳은 염분농도(鹽分濃度)가 0.4∼1.6% 수준이었는데 뱀장어는 여기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체질변화 훈련을 한다.이때 소화기관이 퇴화(退化)되고 생식기관이 특히 성숙한다. 훈련은 첫 얼음이 어는 시기까지 계속되는데 탈락하는 것은 자손번식(子孫繁殖)도 못하고 일정 기간 살다가 죽는다. 이곳에서 훈련을 마친 뱀장어는 내장(內臟)이 바닷물에 적응할만큼 되는데 낙동강 하구(河口)에서 다시 2차 테스트를 해 보고 깊은 바다로의 여행에 들어간다. 3천∼4천 마일의 여행 끝에 뱀장어는 산란장이 있는 태평양 남지나(南支那)의 심해 산란장(深海 産卵場)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암수 뱀장어는 산란을 끝낸 후 모두 죽어 버린다. 고아로 태어난 수많은 뱀장어는 수심 500m 이상 되고 수온 섭씨 15도 내외의 따뜻한 곳에서 3년 가량의 치어기(稚魚期)를 보낸 후 어미들이 살던 낙동강으로 되돌아 온다.김해 녹산 수문(水門) 근처에서는 매년 4월께면 어린 뱀장어(흰살 뱀장어)가 수 없이 몰려 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낙동강을 고향으로 한 뱀장어 떼다. 이곳 구포동에는 해방 이후 구포 선창 나루터에서 가건물을 짓고 잉어회와 장어구이를 팔던 요리집이 즐비했으나 1970년대에 철거되었고 금곡동 동원 마을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왔다. ‘장어 마을’로 지칭(指稱)되고 있는 이곳에는 20가구 중 16가구가 요리점을 열어 놓고 있는데 이 동네 요리집들이 부산의 7진미(珍味) 중의 하나인 장어구이 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의 음식점은 모두가 선대(先代)로부터 물려 받은 전통있는 음식 솜씨를 보유하고 있다. 민물장어 요리는 구워서 간장, 고추가루, 물엿, 마늘, 후추, 된장 등을 섞어 끓여 만든 독특한 기법의 양념장에 찍어 먹는데, 여기에 풋고추, 야채, 시금치, 통마늘이 뒤따르면 맛이 더욱 일품이다. 조리법은 장어뼈와 창자를 골라 내어 토막을 낸 뒤 1차 구이를 하고 양념을 발라 2차 구이를 해서 먹는다. 이 뱀장어는 보양(保養)식품으로써 특히 병환(病患) 후 회복을 위해 장어곰국을 해서 먹고 있다. 1997.09.25 조회수 : 1077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