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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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문화인물 - 이 순 신 이순신(1545∼1598)장군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아 1576년에는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조산보만호와 그 다음해 녹도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장군은 1592년 5월 4일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그 뒤 〈한산도대첩〉, 〈부산대첩〉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뒤 9월 16일에는 10대 1의 열세하에서 적선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랑대첩〉을 거두었다. 그 후 1598년 11월 19일 남해 노량에서 적선 200여척을 부수어 〈노량대첩〉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탁월했던 장군은 전쟁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난중일기”를 비롯,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하는 편지인 “상체찰사 완평 이공 원익서”, “한산섬의 노래”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의 전생애는 그 모두가 충(忠)과 효(孝)로 점철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현대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98.12.23 조회수 : 628
- 이달의 문화인물 - 이 순 신 이순신(1545∼1598)장군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아 1576년에는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조산보만호와 그 다음해 녹도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장군은 1592년 5월 4일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그 뒤 〈한산도대첩〉, 〈부산대첩〉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뒤 9월 16일에는 10대 1의 열세하에서 적선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랑대첩〉을 거두었다. 그 후 1598년 11월 19일 남해 노량에서 적선 200여척을 부수어 〈노량대첩〉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탁월했던 장군은 전쟁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난중일기”를 비롯,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하는 편지인 “상체찰사 완평 이공 원익서”, “한산섬의 노래”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의 전생애는 그 모두가 충(忠)과 효(孝)로 점철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현대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98.12.23 조회수 : 696
- 문화가산책 김 수 근 ·(사)전국 낚시부산연합회 고문·부산북구낙동문화원 고문·낙동민속제전위원회 고문·낙동문화예술인협회 고문·대천리초등학교 운영위원장·전국 서예 공모전 특선외 다수遠上寒山石經斜 / 白雲生處有人家 / 停車坐愛楓林晩 / 霜葉紅於二月花먼 곳에 있는 차가운 산 비탈진 돌길 위 / 흰구름 있는 곳에 인가가 있다. / 수레 멈추고 늦가을 풍경을 감상하니 / 서리맞은 단풍잎이 이월 꽃보다 더 붉다. 1998.12.23 조회수 : 624
- 덕토노인문학상 시상 제2회 덕토노인문학상 시상식이 지난 19일 구청 대회의실에서 거행됐다. 덕토 노인문학상은 덕성토요노인대학(학장 이원우)의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전국 최초의 노인 문학상으로 매년 1회 노인들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과 수필 두 부분에 대한 작품을 공모, 수상자를 선발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년과 비슷한 수준인 66편의 원고가 응모되었는데 소설부문에는 좥어르신네 우리 어르신네좦의 단편소설을 쓴 권성해씨가 또, 수필부문에는 좥식을 줄 모르는 열성좦이라는 제하의 글을 쓴 박명선씨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수상자들을 만나 수상소감을 들어 보았다.△ 노인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당선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 상을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상을 의식해서 집필한 작품도 아니다. ‘좋은 작품’, ‘훌륭한 작품’이라서 상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평가 받은 듯 싶다. 더욱 좋은 작품을 쓰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 덕토 노인문학상 공모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작년에 발행된 문예지에 수록되어 발표되자 노인문학상에 응모해 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당시 잡지에 연재중인 장편소설 집필에 매달리다가 마감날짜를 놓쳤다. 올해 이 작품이 문학상 운영위원회에 접수되어 결실을 본 것이다. △ 덕토노인문학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문학에는 감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 감동은 삶의 근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노인문학도 예외일수가 없다. 신변잡기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올바른 노인문학 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노인들은 소외계층으로 밀려나 있는 추세다. 이럴 때일수록 덕토 노인문학은 노인들의 삶에 활력소가 될 것이며 올바른 지표가 될 것이다. △ 전업작가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의 작품 활동계획은?- 다른 예술가도 그렇지만 작가가 ‘좋은 작품’,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작품에 전념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최근 서울에서 발행된 일간지에서 소설가 이문열씨는 ‘인기 작가지만 좋은 작가는 아니다’라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비평문을 보았다. 나는 인기 작가는 아니지만 좋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내 생각이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가정을 이끌어 가지 못하고 그 일이 내자의 몫이 된 것이 늘 미안할 뿐이다.·영남일보신춘문예, 문화방송작품현상공모, 부산문화방송 현상작품공모에서 당선, 창주문학상, 청구문학상 등 수상. 대표작 장편소설 <실락원에서 복락원까지>, <겨울바다>, <저 건너 또 하나의 풍경>, <파피야스에서 니르바나까지> 외 중·단편소설 꽁트, 시, 수필, 동시, 동화등 3,000여편의 문학작품과 시론 등 발표수필부문 수상자(수상 소감) 박명선아버지! 아버지란 단어는 세상의 그 무엇이 줄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는 듯합니다. 언제나 최고 멋진 사람으로 와 닿던 아버지의 풍채는 시루에 밀려 마른 대추같고 석류 같으신 치아를 의치(義齒)로 바꾸어 버린 아버지. 내리 사랑은 당연한 듯이 받기만 고집하며 치 사랑은 인색했던 것을 자괴하면서, 나의 영원한 버팀목으로 스승이 되어 주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름에 못다 배운 컴퓨터 교육을 이번 겨울 방학 때 다시 받으시겠다며 기다리시는 고희를 앞둔 아버지의 그 열성 높이 치하합니다.삶이란 언제나 희비가 엇갈리나 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집안의 우환속에서 들리어 온 복음(福音)은 실로 아름답고 신나는 소식이었습니다. 만삭되지 못한 저의 졸작을 덕토 노인문학상에 선정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쪾경남 거창군 신원면 출생, 고려 성경 전문학교 졸업, 동아대 사회교육원 산문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월간 고신 신앙간증 현상 수기공모 금상 수상, 미국 캘리포니아 Epipodo(에피포도) 문학회 신인상 수상, 수비 문학회, 부산 문인협회, 고려 문학회 회원 1998.12.23 조회수 : 629
- “종이공예는 응용범위가 넓고 기법도 다양” 크리스마스 카드, 닥종이 인형, 관세음도, 코스모스, 단풍, 부케, 꽃다발, 해오라기, 달마도……무려 140여점의 다양한 종이공예 작품들이 지난달 27일부터 일주일 동안 구청 세무과 앞에서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전업주부인 문미순씨(42세, 만덕2동). 남편 출근과 자녀등교 준비로 바쁜 아침시간을 보내고 나면 찾아드는 무료함. 이제는 뭔가 해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난 97년 5월이었다. “백산초등학교에서 지역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취미교실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했죠” 바로 이것이 계기가 돼 그는 일약 종이공예가로 꿈을 키우게 된다. 그후 불과 1년 6개월 여만에 작품 전시회를 열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된데는 나름대로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했다. 종이접기협회에서 소정의 교육을 이수한 그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많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종이공예가 인격수양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종이공예는 종이접기, 종이조각(종이감기), 한지그림, 색지공예, 지호공예, 지승공예, 종이인형(닥종이 인형), 꽃장식등 그 응용범위가 넓고 기법도 다양해 성인들이 배우는 생활공예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의 작품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닥종이 인형. 철심으로 골격을 세운 뒤 그 위에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드는데 최소한 4개월이 걸린다. 투박함에 오히려 정감이 간다는 닥종이 인형은 그의 창작열을 북돋아 주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닥종이 인형은 관람자들의 시선을 모았던 작품이다. “이번 첫 전시회는 저에게 소중한 경험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저의 졸작에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더욱 알찬 전시회를 준비해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첫 전시회라 작품 판매를 하지 않았다는 문미순씨는 내년 전시회에는 작품을 판매해 부산북구장학회 기금으로 전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1998.12.23 조회수 : 596
- 우리고장의 자랑 - 만덕 염소 오리불고기 단지 북구와 동래구를 잇는 만덕터널 입구 일대에 자리한 만덕 염소오리불고기 단지. 금정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병풍처럼 펼쳐진 상계봉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남으로는 의젓하게 우뚝 솟은 백양산이 거센 해풍을 막아주며 서쪽으로는 언제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볼수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마애석불로 유명한 석불사와 금정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어 평소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40여 음식점에서 간직한 30년 전통의 각종 음식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 먹거리 가운데 토종오리, 흑염소 요리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하여 허약체질, 고혈압 예방에 효능이 아주 높아 옛부터 궁중요리에 많이 애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이곳 산자락에서 유기농법으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상추, 고추, 깻잎 등 무공해 야채와 곁들여 제공하고 있어 건강식으로도 인기가 높다. 번영회 회장 문장헌씨는 “먹거리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40여 가구 주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다양한 요리 개발에 힘쓰고 있으며 요즈음은 꿩샤브샤브, 잉어찜 요리도 맛볼수 있다”고 한다. 아늑하고 편리한 대·소 연회실과 승합차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 가족이나 단체모임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염소오리불고기 단지는 고려시대 절터인 만덕사지와 문화재 14호인 만덕사지 당간지주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문화유적 답사 등 학습장으로서도 좋은 곳이다. 이곳 마을의 골목길과 밭둑길을 거닐면서 도심속의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취를 맡으며 그 옛날 고려인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김은숙 명예기자북구와 동래구를 잇는 만덕터널 입구 일대에 자리한 만덕 염소오리불고기 단지. 금정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병풍처럼 펼쳐진 상계봉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남으로는 의젓하게 우뚝 솟은 백양산이 거센 해풍을 막아주며 서쪽으로는 언제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볼수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마애석불로 유명한 석불사와 금정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어 평소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40여 음식점에서 간직한 30년 전통의 각종 음식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 먹거리 가운데 토종오리, 흑염소 요리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하여 허약체질, 고혈압 예방에 효능이 아주 높아 옛부터 궁중요리에 많이 애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이곳 산자락에서 유기농법으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상추, 고추, 깻잎 등 무공해 야채와 곁들여 제공하고 있어 건강식으로도 인기가 높다. 번영회 회장 문장헌씨는 “먹거리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40여 가구 주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다양한 요리 개발에 힘쓰고 있으며 요즈음은 꿩샤브샤브, 잉어찜 요리도 맛볼수 있다”고 한다. 아늑하고 편리한 대·소 연회실과 승합차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 가족이나 단체모임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염소오리불고기 단지는 고려시대 절터인 만덕사지와 문화재 14호인 만덕사지 당간지주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문화유적 답사 등 학습장으로서도 좋은 곳이다. 이곳 마을의 골목길과 밭둑길을 거닐면서 도심속의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취를 맡으며 그 옛날 고려인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김은숙 명예기자 1998.12.23 조회수 : 795
-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29 - 구포지역 민속신앙의 유습(遺習) 백 이 성 (낙동문화원 원장)구포(龜浦)지역은 예로부터 물을 배경으로 한 수로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던 곳으로 고대 원시신앙의 유습과 유적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것은 구포가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 강 하구지역의 중심세력이 있었던 곳이며 제사를 행하던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구포지명의 ‘거북 구(龜)’를 신(神)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조선시대 구포나루터의 공식지명인 감동진(甘同津)의 유래에도 신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우리 고장 민속신앙의 유습은 구포출신 민속학자인 손진태(孫晋泰)선생이 일제시대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마을의 큰 잔치였던 별신굿과 솟대와 장승신앙 그리고 알터바위의 신앙 등이 있다.구포의 별신굿낙동강 수로(水路)교통의 출발지였던 구포지역 나루터의 이름은 감동진(甘同津)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정부에서 받아 들인 조세(租稅)곡물과 물품을 쌓아 두는 남창(南倉)이 설치되어 감동진 나루에는 공물선, 상선, 어선 등이 많이 드나들었고 강변의 장터는 크게 번창하였다. 우리 고장에 전해오는 민속의식이 별신굿이다. 구포지방의 별신굿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에 구포출신의 손진태(孫晋泰)씨 등 민속학자들 사이에 많이 연구되어 왔으며,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간행한 『석전(釋奠), 기우(祈雨). 안택(安宅)』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구포에서는 매년 혹은 격년(隔年)으로 별신굿을 지낸다고 되어 있다. 만약 별신굿을 하지 않으면 마을에 화재(火災)나 수해(水害) 또는 그 밖의 재앙(災殃)이나 질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별신(別神)의 별(別)은 마을을 뜻하니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란 말이다. 별신굿은 여러 사람의 무녀(巫女)가 맡아서 하는데 “앞 당산(堂山) 골목이 남당산(男堂山), 여당산(女堂山) 님(主) 제물(祭物)을 많이 잡수시고 동네의 집집마다 부귀공명(富貴功名)이 있게 해 주시고 가뭄도 홍수(洪水)도, 없으며 잡귀(雜鬼), 잡신(雜神)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마을을 지켜주시라”는 뜻의 사설(辭說)을 외우며 춤을 춘다는 것이다.별신굿은 당산제(堂山祭)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안정(生活安定)과 재화방지(災禍防止)를 위한 것으로 한해의 성사(盛事)이며 굿의 결과로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이 초래되고 재앙(災殃)을 막자는 소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겠다. 솟대와 장승 신앙옛날 구포에서는 별신굿을 할 때 먼저 산신(山神)을 위하고 다음에 동구(洞口) 앞에 세워진 솟대와 장승을 위하는데 제전 3일전부터 솟대와 장승의 주위를 청소하고 황토(黃土-일명 禁土)를 뿌리고 금줄(禁繩)을 이들의 신체(身體)에 돌려 묶어서 부정(不淨))을 막기 위해 그 앞에 제상(祭床)을 차리고 제물(祭物)을 갖추어 동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무녀(巫女)가 빌게되어 있으며 이것도 같은 시간에 솟대와 장승 양쪽을 향하여 행해졌다고 한다. 구포에서는 동네 입구에 솟대가 있고 장승이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의 이정표(里程表) 역할을 하는 장승을 솟대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인식하여 정초(正初)에 마을굿(지신밟기)을 할때도 금줄을 치고 풍물을 울리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솟대의 유래신에 대한 제사는 고대에 있어서 『소도(蘇塗)』라고 불리우는 성역(聖域)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구포의 소도는 일찍이 구포 출신의 민속학자(民俗學者) 손진태(孫晋泰)선생의 ≪조선민족문화(朝鮮民族文化)의 연구(硏究)≫ 중의 ‘소도고(蘇塗考)=솟대고’에서 구포의 솟대(蘇塗)가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고 사학자(史學者) 김상기선생도 ‘구포소도고(龜浦蘇塗考)’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이제는 구포에서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소도의 성격을 고찰하여 보면 소도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지 위지 한전(三國志 魏志 韓傳)에 나온다. 또한 후한서 마원전(後漢書 馬援傳)과 진서, 사이전 (晋書, 四夷傳) 통전(通典)등 중국측의 기록에만 나오고 그 뒤의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따라서 소도는 삼한(三韓)시대 고유의 것이며 불교문화가 들어 온 삼국(三國)시대 이후는 중요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습(遺習)은 민속(民俗)으로 전하여 많이 변모되긴 했으나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말한 여러 문헌(文獻)을 통하여 소도는 별읍(別邑)이라는 성역(聖域)이었으며 이 성역속에서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단 신간(神竿)이 있었고 제사에 온 부족(部族)이 모였으며 천군(天君) 또는 군장(君長)이라는 사람이 제사를 집행하고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음주가무(飮酒歌舞)를 행하였다고 되어있다. 위에서 본 소도의 여러가지 요소(要素)는 현재 구포동을 비롯한 옛 삼한(三韓) 땅의 여러 마을에 동제(洞祭)나 신간(神竿) 등의 유속(遺俗)과 함께 당산나무가 당집으로 남아 있어 내용과 형식에 많은 변화는 있었을지라도 꾸준히 오늘까지 이어져 절멸(絶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목조신간 즉 솟대에는 여러가지 명칭이 있으니 목조소도(木鳥蘇塗), 솟대, 솔대, 소주, 소줏대, 포줏대, 거릿대, 갯대, 수살이, 수살이대, 수살목, 액(厄)맥이 등이 그것이다.일시적 신간에는 일시신간(一時神竿), 볏가리, 화적(禾積), 화간(禾竿), 보리볏가리, 풍간(風竿) 등의 이름이 있다. 솟대와 장대에는 왼새끼줄이나 먹줄선으로 용틀임을 하거나, 장대 자체로 용틀임처럼 비틀려 꼬인 나무를 일부러 골라 쓰기도 했다. 또한 시냇물을 건넌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내어 세움으로써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것등은 솟대와 농경문화의 관련성을 나타내 준다.솟대에 올려지는 새는 오리, 기러기, 해오라기, 까치, 까마귀 등이 있는데 오리 종류가 대표적인 것이다.철새류인 오리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 준다거나 홍수를 막기도 하고 화마(火魔)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등 역할을 해내는 새로서 종교적 의미가 부여 되어었다.오리가 갖는 특성으로는 물새, 철새, 다산성(多産性)을 들 수 있다.물새로서의 오리는 물위를 떠다니고, 잠수할 수 있는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오리는 비와 천둥을 지배하는 천둥새의 속성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는 비를 가져다주는 농경 보조신으로 정착되어 있다. 그리고 오리는 1년에 300~360개까지 알을 친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속담은 흔히 남의 것을 떼어먹고 사라졌을 때 쓰는 잘못된 표현인데 이는 오리의 다산성을 나타내주는 말로 보는 것이 옳다.구포에는 강변의 구장터 근처에 1920년대까지 솟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장승의 유래구포에는 장승도 있었다.구포의 장승에 대하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에 보면 1930년 여름에 저자인 손진태선생이 구포의 무녀(巫女) 한순이(韓順伊)로부터 들은 말을 기록하고 있다. 즉 동구(洞口) 앞에 세워진 남녀 한쌍의 장승은 이정표(里程表)로 생각하지 않고 소도(蘇塗)와 같이 잡귀(雜鬼), 잡신(雜神)의 침입을 막아 한마을을 지킴으로써 그 역임(役任)을 삼고 매년 혹은 3년마다 정월 중에 무녀(巫女)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동네굿(속칭 별신굿)때에는 여러 신(神)중 주로 산신(山神)을 위하고 다음에 소도와 장승을 위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 개인이 수시로 이들에 대하여 금줄을 치고 제물을 차려 병이 낫기를 비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구포의 장승에 대하여 구포 출신 민속학자 손진태선생의 기록이 있고 또한 구포의 무녀(巫女)의 증언에도 동리 입구에 있는 남녀 한쌍의 장승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위치는 옛날 대리동네 남쪽 입구인 비석골 언덕 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98.10.26 조회수 : 637
-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1 - 금정산성의 서문(西門)과 남문(南門) 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금정산성(金井山城)은 동해바다를 앞에 둔 금정산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를 빨리 발견하여 이에 대처하고외부와 단절된 채 천험(天險)을 이용, 지구전을 계속하려는 의도에서 쌓은 성이다.금정산성은 산기슭에서 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용틀임처럼 휘감고 여러 개의 계곡을 돌아 정상 가까이 이어진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산세가 급준하고 기암괴석이 많고 수목이 울창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다.산성은 성벽과 문 등 많은 유구를 남기고 있으며 석축 둘레의 길이가 17,337m이고 성벽의 높이는 산능선에서 1.5m에서 5m 가량이며,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인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서 전략적으로 요긴하게 축조되어 있다. 또 이 산성은 정방위는 아니지만 동서남북 적당 거리로 출입문이 나 있고 구릉엔 7개의 망루가 세워 져 전망대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언제 쌓았을까금정산성은 언제 축성 되었는지 문헌상으로 기록은 없다. 고대 부터 동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가 침입 하였던 사실을 미루어 보아 신라때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제1권 금정산성조를 보면 원래 신라시대 부터의 산성이라는 사실은 이 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신라시대 축성한 근거를 찾아 보면 산성의 4대문 가운데 동서 양문은 고려,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조선시대 다시 축성된 산성1701년(숙종27) 11월 경상감사 조태동이 좧동래는 해방(海防)의 중요한 고장이며, 적이 처음 발 딛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 조각의 성도 없이 심히 소홀한 지경이니 금정산에 축성하기를 청한다.좩고 하며 이에 숙종이 동의하여 성축의 뜻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축성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어 1703년에 준공을 보았다. 완공된 산성은 둘레가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이 성은 성가퀴가 낮고 허름할 뿐 아니라 재력만 낭비한 꼴이라는 비난이 일어났다. 단 시일에 광대한 축성을 행하여 조잡하였던 것 같다. 1707년(숙종33)에 이 산성의 주위가 너무 넓으므로 이에 관리가 곤란하다고 하여 당시 동래부사 한배하가 동쪽의 제4망루에서 서문을 잇는 5,643보의 중성을 쌓고 부속시설을 정비하였다. 또 1806년(순조6)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그간 관리가 소홀하여 퇴폐하였다 하여 조정에 알리고는 역사를 일으켜 1807년에 동문을 신축하고 이듬해 서·남·북성루 세문을 완공하였다. 1824년(순조24) 동래부사 이규현이 이곳에 별장을 배치함으로써 동래부의 피난 겸 항전성으로써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 당시 산성 길이는 32리였으며 그때의 유지가 바로 현존하고 있는 산성이다. 현존 성내에는 당시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지 않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좌기청 6간, 좌우행장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 교련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있었으며, 그 중 산성창에는 미곡 2천석과 백목 56동을 비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도훈도, 군뇌, 문직 등의 직책을 맡은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던 것이다. 숙종조에는 산성내에 있는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병 각각 1백 여명과 범어사의 승병 3백 명으로 수비케 하고 동래, 양산, 기장 세읍에 있는 암쪾사찰 승병 수천명으로 작대(作隊)를 편성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 방어에 임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동래부지>>(1740)의 군총조에 포함되어 있는 승군 작대는 316명이다. 1703년에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작대의 승영(僧營)으로 기능을 하였던 곳이였다. 그렇다고 볼 때 이곳 국청사는 임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 작대의 사령부격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좧金井山城僧長印좩이라는 글이 새겨진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어 호국 영령의 상징인 증거물로써 스님들의 구국의 뜻을 말해 주고 있다. 금정산성은 일제 침략기에 들어와 산성의 군, 관아 건물은 파괴되고 무기 또한 몰수 당하였다고 한다.금정산성 현황(사적 제215호)금정산성의 복원된 과정을 살펴보면, 1972년에 동문과 남문이 건립되고 1973년에 서문과 홍현수문이 건립되었다. 1976년에 동문과 남문의 번화와 낙뢰로 와해된 망루가 복원 되었다. 그후에도 이 광대한 산성을 계속 보수하여 1978년에 동문여담과 좌우협문 2개소를 해체 복원 하였으며, 성곽 계단을 교체하고 서문 수로를 보완 보수 하였다.1979년에 제1, 2, 3, 4망루 건물의 복원과 성곽 보수를 하였고, 1980년에 야문을 복원하였다. 1983년에 제2망루에서 309m 성곽을 보수 하였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제4망루에서 서문으로 축성된 중성 성곽 일부인 500m 복원하여 계속하고 있다. 이에 복원된 산성의 모습과 그 현황을 우리 고장과 연관된 남문을 서문을 고찰 해 본다.서문(西門)서문은 네 성문 중 규모와 형태가 잘 갖추어진 대표적인 성문이다. 다른 성문에서 볼 수 없던 시설로 좌우에 적대(敵臺)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한 장소로서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대를 견고하게 석성한 것으로 높이가 5m가량 되며 1m가량 상단에는 전돌로 쌓아 8∼9개의 타구(총구멍)를 뚫어 놓았다. 산성마을에서 흘러 내려오는 금성천이 성내로 지나고 있다. 성내는 금성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3개의 아치형인 홍현수문을 설치하였다. 수문 위로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여장 통로를 마련하여 놓았는데 성내의 물을 조절하는 시설인 가는 물줄기를 설치하여 성내의 물을 빼내는 은구(隱構)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남문(南門)남문은 동래를 향하여 남향으로 서 있다. 돌로 높이 쌓은 육축 가운데에 아치형 문을 내고 그 위에는 장중한 누각을 세웠다. 아치형 문의 높이가 5m, 너비 2m, 두께가 4m로 아치에는 두짝 나무문에 철엽을 달아 놓았다. 누각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목조 건물이며, 산성의 정문으로서 위엄을 한껏 갖추었다. 남문은 성 높이가 지표보다 높은 곳까지 육축 되었으며, 이 부근에는 가야시대의 경질토기편이 수집되어 옛날부터 가야 사람들이 금정산록에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남문 앞에 큰 바위가 있는데 용이 움추려 앉아있는 형상이라 용바위라 불렀다.남문 앞에는 토속음식을 파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을 예로부터 만덕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재 남문은 1972년 복원 당시 부실했던 분야를 보완하기 위해 완전 해체하여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장골봉의 석문(石門)고당봉에서 서쪽으로 성벽을 따라 4㎞ 능선길을 가면 암문이 파손되어 있고 금곡 물래재를 지나 15분쯤 올라가면 울창한 수림에서 벗어나 기암괴석들이 서로 다투듯이 서 있는 마지막 능선으로 치켜 오른다. 길게 이어졌던 능선이 갑자기 단절된 듯이 절벽처럼 아래편으로 쏟아진 장골봉(494m) 아래에 위치한 망루 터에 이른다.이 망루는 오묘한 지형을 이룬 곳에 있다. 바위들의 단애 위에 성곽이 석문을 U자형으로 절곡하면서 망루를 짓고 그 주위를 성벽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기능의 위치로는 더할 나위 없는 명당 자리이다. 10여평의 자리에 돌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문은 좌우의 돌담을 잃고 출입문만 홀로 서 있다. 석문(세로 1.5m×가로1m)은 석조로서 양편의 기둥 아래 위로 둥근 홈이 4개 파여 있고 밑에서 45㎝에는 정사각혁의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는 문지두리홈과 문빗장홈이 있어 문을 걸고 잠근 것을 알 수 있다.그 주위에는 기왓장이 흩어져 있어 4간 누각의 지붕은 성벽 밖으로 펴져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이 망루에서 서쪽은 낙동강, 북쪽은 고당봉, 동쪽은 제4망루와 동문 너머 멀리 동해가, 남쪽은 파류봉 망루가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금정산 장골봉에 돌보는 이도 없이 형편없이 버림받고 외로이 서 있는 석문. 외롭게 버려둘수만은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이 석문은 오랜 세월동안 홀로 비바람을 이겨오고 있다. 1998.12.23 조회수 : 666
- 민원상담실 - 폐업신고는 이렇게 문)저는 식육점을 운영하다가 97년 8월경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 등록증을 반납하고 폐업신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98년 1월 정기분 면허세가 부과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요?답)면허세의 과세기준일은 매년 1월 1일 현재이며, 각종 인·허가 및 등록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자를 납세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경우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 등록증을 반납하고 자진 폐업신고를 하였지만 최초 신규허가를 받은 위생과(현재 지역경제과로 업무 이관)에 가셔서 허가(신고)증을 반납하고 폐업신고를 하지 않으면 허가가 살아있어 계속 면허세가 부과됩니다. 세무서에서의 사업자 등록증 반납 및 폐업신고는 부가가치세 및 소득세와 관련하여 영업기간에 따른 세액 산정을 위한 신고이며, 허가부서에서의 폐업신고는 취득한 허가의 취소를 위한 신고이므로 세무서에서의 폐업신고와 허가부서에서의 폐업신고는 동일한 폐업신고가 아닌 것입니다. 휴업기간 중 부가가치세와 종합소득세는 과세되지 않지만 면허세는 부과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그 이유는 자명하리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식육판매영업 뿐 아니라 이·미용업, 세탁업, 숙박업, 일반음식점 영업허가 등의 폐업신고도 동일하므로 폐업시 반드시 세무서와 허가부서에 폐업신고 하시기 바랍니다.·문의 : 북구청 세무과 (☎ 309-4213) 1998.12.23 조회수 : 628
- 제2회 덕토 노인 문학상 시상 오는 12월 19일 오후 1시 30분 구청 대회의실에서 제2회 덕토 노인 문학상 시상식이 오는 12월 19일 오후 1시 30분 구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덕토 노인 문학상은 덕성토요 노인대학(학장 이원우)의 자원봉사자들이 십시일반 낸 기금으로 만든 전국 최초의 노인 문학상으로 2년째를 맞고 있지만 캐나다 교민이 소설을 보내올 정도로 해외에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다. 현재 접수를 마감하고 총 66편의 작품에 대한 심사에 들어갔는데 오는 11월말까지 수상작을 선정할 계획이다. 노인문학이란 노인들의 삶을 형상화한 글로서 노인들이 읽거나 노인들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쓴 글들을 말한다. 덕토 노인 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내년에는 LA등 해외교민 회보를 통해 적극 홍보함으로써 노인문학이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정신문화로서 세계속에 뿌리 내리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한편 제1회 문학상의 경우 78편의 작품이 접수되었는데 본상에는 ‘세월이 가면 모두 늙는다'는 제하의 글을 쓴 성낙구(수필가 금정구 부곡동)씨가 우수상에는 ‘노인의 초상’을 쓴 이성남(시인, 서울거주)씨가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은바 있다. ·문의 ☎362-6622, ☎301-2710 1998.11.25 조회수 : 1370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