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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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⑮ - 화명동 수정 마을

  • 1997-05-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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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釣臺), 학사대(學士臺)가 있는 화명동 수정 마을

백 이 성(낙동향토문화원장)

지난 5월 14일 화명동 수정마을에서는 향토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을의 내력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정 (水亭)마을의 내력 (비문)
우리 고장은 상학산(上鶴山) 줄기인 함박봉을 배경으로 예로부터 낙동강 물이 안기는 곳으로서 언덕 위에 길손이 쉬어가던 정자나무와 너른 들이 있어 수정원(水亭員)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풍수지리상으로 정자가 있던 곳은 상학산 줄기에서 학의 목 부분에 해당되어 수정목이라 하였고 강물이 돌아 흐르던 곳에 선비들이 산천(山川)을 읊었던 학성산의 학사대(學士臺)는 학의 머리부분으로 수정끝이라 부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용(龍)이 유영(遊泳)하는 형상이라 하여 용수동(龍水洞)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 남쪽 앞산에서 신석기시대 돌도끼가 발견 되었고 가야시대 옛무덤인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되어 우리 고장이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배움터인 양사재(養士齋),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양수정(養水井), 강변 암벽 위에서 낚시질하던 조대(釣臺) 유적들과 대장골(大莊谷)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고장인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향토의 옛 모습이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을 볼 때 선조들이 남기신 발자취를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하여 주민들의 뜻을 모아 수정 마을의 내력을 돌에다 새겨서 남겨 놓는다.
檀紀 4330年 陰 4月 8日
水亭鄕土保存會

수정마을의 문화유적
(1) 조대(釣臺)
수정마을은 예로부터 집터의 명당자리로서 누대승람 등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었다.
① 적색(赤色)을 띤 암벽(巖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내려오고 있다. 釣臺主人 林景澤
조대(釣臺)에서 낚시질 하던 임경택(林景澤)을 새겨놓은 것이다.
이 조대(釣臺)는 조선시대 경상도지(慶尙道誌) 누대승람(樓臺勝覽)편에 <釣臺 林景澤 所築>으로 나와있다.
② 이곳 조대의 암벽 상층부에는 네모난 돌에다 金之觀 이름을 새겨서 올려 놓았다.
이곳을 마을에서는 철도가 돌아가는 모퉁이라서 돌비석의 이름대로 김지관 모랭이라고 부른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수정 마을에 뿌리를 내린 집안 중에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며 살고 있다. 김지관(金之觀)은 수정 마을에 정착하여 동네를 일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후세에 그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동네에서 조대(釣臺) 바위 위에 비명(碑銘)을 새겨 올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
김씨 집안 족보에 의하면 김지관은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전의 1802(순조20년) 수정 마을에서 태어났던 인물로 나와있다.

(2)학사대(學士臺)
수정마을의 철길건너 강변쪽에 학성산(鶴成山)이 솟아 있다. 이 산의 정상이 학사대(學士臺)인데 정상부위의 바위에 학사대 대명(臺名)과 경관(景觀)을 나타내는 글이 새겨져 있다.
學士臺
一心秋月 四面春風
禮曹左郞 金載鎭

양산군지(梁山郡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學士臺
在 左耳坊水亭里 後 金載鎭 臺名 曰 「一心秋月 四面春風」
(좌이방 수정리 뒤에 있으니 김재진이 대명에 가로되 ‘一心秋月이요, 四面春風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좧一心 秋月 四面春風좩이란 글은 금정산에 가을 달이 환히 떠오르는 경치와 낙동강과 산을 끼고 4방에 봄바람이 부는 경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근본정신인 지조(志操)와 너그러운 기풍(氣風)을 선양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예조좌랑 김재진(禮曹佐郞 金載鎭)은 과거(科擧) 급제자로 양산읍지에 소개되어 있다.
이곳 학사대(學士臺)를 일명 학수대(鶴首臺)라고 하여 풍수지리상 상학산(上鶴山)에서 양 날개를 편 학(鶴)의 머리 부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상학산에서 학이 강으로 날아가는 형상의 지형을 나타내 주고 있다.
앞쪽 수정마을에 학의 목이 되는 곳으로 수정목이라는 지명이 전해 오는데,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풍수상 명당자리인 학의 목 부분을 자르기 위해 철도에 편입 시켜 공사를 벌였는데 이 곳 일대에서 피가 나오듯 붉은 물이 고였다고 전해온다.

(3) 양사재(養士齋)
김씨 문중의 재실(齋室)로서 조선시대 서당이 있었다. 지금의 화명중학교 자리에 위치 했는데 이 서당에서 5진사(進士)가 배출 되었다고 한다.

(4) 허씨 독 서당(許氏 獨 書堂)
수정마을의 허진사댁 첫째 대문 앞 남쪽으로 허씨집안의 서당이 있었는데 이곳의 웃채 3칸집은 서당 훈장(訓長)댁이었고 아랫채 3칸 접집이 서당이었다.

(5) 고당할미당산
수정마을 뒤쪽 옛날의 동네 자리로 가는 곳에 있는 마을의 당산이다.
여기에 있는 당산나무인 소나무의 수령(樹齡)이 4~500년 된 것으로 보아 내력이 깊은 고당할미당산으로 보인다.
매년 정월 보름 날 자정(子正)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6) 포구나무걸
옛날 구포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경관이 좋았던 이곳에는 500년 이상된 2그루의 포구나무가 있었는데 동네의 정자나무로서 길손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국도확장공사로 밀려나 없어졌다.



◎ 수정마을의 전설
허섭 진사와 대장골 도적 이야기
옛날 화명에서 동래로 가는 길인 대장골의 뒷산은 산적의 본거지였다. 그래서 대장골을 일명 대적골, 대정골이라고 했다. 구한 말 대장골 아랫 동네인 수정 마을에 부자였던 진사(進士)허섭(許攝)이 살고 있었는데 산적들은 매년 1회씩 정례적으로 허진사댁에 와서 양식을 약탈해 갔다. 도적의 연락을 맡은 부하가 허진사댁에 와서 며칠 후에 우리가 올 것이니 곡식을 찧어놓고 준비해 달라고 통보를 하였다.
산적들은 지정된 날이 되면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데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대문을 잠그고 부녀자를 숨겨 놓고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는다.
산적들은 앞산에 와서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허진사댁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음식을 준비해 놓고 하인을 시켜 산적을 인도하여 불러 들여 대접을 하는 사이에 두목과 허진사는 사랑채에서 대작을 하면서 갖고 갈 물자를 흥정을 하였다.
흥정이 끝나고 곡식 등 물자를 내어 주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 유유히 사라졌다. 이처럼 산적의 본거지와 가까운 수정마을은 부자인 허진사 한사람의 공덕으로 산적을 막아 내어 마을 사람들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허섭(許攝)진사는 실존했던 인물로서 조선 철종 임술년(1862년)에 수정마을에서 태어나 고종 갑오년(1894)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는데 일제 초기인 1914년 구포 구장터에 불이 났을 장터를 재건하기 위한 기금을 모을 때 그 당 시 구포은행이 낸 성금 150원(圓) 보다 더 많은 160원(圓)을 내어 향토를 위한 애착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단체에서 은밀히 자금을 모우러 다녔을 때 화명에 오면 반드시 수정마을의 허진사 댁을 찾았고 허진사는 많은 자금을 선뜻 내주는 인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