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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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7 - 덕천동 의성, 기찰

  • 1997-08-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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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동 의성(義城)과 기찰(譏察)의 유적

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장)

덕천(德川)이란 지명(地名)은 원래 만덕(萬德)쪽에서 흘러 내리는 하천(河川)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상학산(上鶴山)의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들을 받아 안고 서쪽 강변쪽으로 벋어내린 산 줄기를 끼고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 바로 덕천(德川)인 것이다.
이 하천의 하류를 끼고 남쪽 높은 지대에 남산정(南山亭) 숙등(淑嶝) 마을이 있고 하구에 이르면 북쪽으로 옛 성터인 의성산, 의성대(義城臺)가 올려다 보인다. 성터의 동쪽 연둥개 갯가의 구법곡(仇法谷) 입구에 조선시대 관서였던 기찰(譏察)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의성산의 동북쪽 구릉지대가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初期)의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되었던 대장골(大莊谷)입구이다. 이곳 고분이 있었던 곳의 뒷산 능선에서 빗살 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우리고장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구법곡에 기찰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의성 옛 성터에 왜군이 주둔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는 이곳의 지명은 공식적으로 양산군 좌이면 산양리(梁山郡 左耳面 山陽里)로 나와 있다.
그 당시 좌이면(左耳面)에는 현재의 금곡동에 공창(公昌) 동원(東院), 화명동 쪽에 대천(大川) 와석(臥石) 수정(水亭), 용당(龍塘) 덕천동 쪽에 산양(山陽') 구포대리쪽이 시량(師良) 강변쪽으로 남창(南倉), 그리고 그 아래 삼락동쪽의 섬이었던 유도(柳島)와 강 건너 소요도(所要島)가 소속되어 있었다. 산양(山陽)마을인 이곳 일대의 지명은 현재 의성 마을과 기찰마을로 남아 있다.


의성마을의 유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왜성(倭城)을 쌓아 주둔 했던 곳으로 넓이 1800평의 성터에는 아직도 성벽이 남아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감동포성(甘同浦城)으로 나와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가야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성을 지키던 신라의 황룡장군과 500명의 군사들이 왜구의 침략을 맞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의(義)로운 죽음을 상징하여 의성(義城)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의성마을은 성터의 강변쪽에 있던 마을을 바깥의성이라하고 성터 서편을 끼고 있는 안쪽마을은 안의성이라고 했다.
바깥의성은 경부선 철도를 놓기전에는 배를 대던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곳 나룻가 물속에는 농처럼 네모 난 농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구포에서 덕천내를 지나 바깥의성에서 안의성으로 성을 끼고 넘어가는 고개가 의성고개이고 화명동 수정마을에서 넘어 오던 고개는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고개라고 불렀다.
밤나무고개는 옛날 구포장에서 소를 팔고 가다가 도둑들에게 돈을 털렸던 외진 곳으로 소문이 났던 고개이다.


구법진 기찰의 내력

조선시대 구포 남창(南倉)이 있던 감동진(甘同津) 나루에는 세곡(稅穀)을 조운(漕運)하던 배가 드나들었고 금곡 동원진(東院津) 나루에는 일본인들이 교역(交易)하던 배가 오르내렸는데 이곳 일대에서 밀무역과 잠상(潛商)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구법곡 입구에 수검소(搜檢所)인 기찰(譏察)을 두고 찰방(察訪) 근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구법진(仇法津) 나루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찰이 있었던 이곳의 의성 작은산 암벽 앞쪽에 있는 은호아파트의 신축대지 공사중에 삼국시대의 토기 7점이 발굴되어 이곳이 역사적 내력이 있는 지역임을 증명해 주었다. 기찰에서 의성 성터의 동쪽으로 올라가면 현재 낙동고등학교아 덕천여중이 있는 산봉우리 끝머리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을 가는골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화장막이 있었고 이곳에 상여를 메고 가는 곳으로 가는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구법곡에는 일제시대 군 보급기지창이 들어서서 낙동고등학교자리에 피복창과 곡물창이 있었고 탄약을 저장했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새로이 등장한 지명 ‘덕천로타리’

이 고장 교통의 중심지인 덕천로타리!
덕천로타리 일대를 살펴보면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도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만 하더라도 만덕 쪽으로 가는 소로(小路)가 있었는데 1963년에 동래쪽으로 가는 차도(車道)를 개설하였고, 덕천냇물을 건너는 다리와 양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있었을 뿐이다.
그 이후 1973년에 들어와서 남해안 고속도로를 내면서 의성 성터인 큰산과 그 아래로 벋어내린 작은 산 허리를 잘라 그 사이에 도로를 닦고 강건너 대저 출두리와 연결하는 낙동강 다리를 개통하면서 서부 경남을 잇는 인터체인지가 가설되었다. 뒤이어 70년대 말 덕천하류지역 일대 30만평을 아파트 단지로 고시하면서 옛날의 야산과 논바닥들이 모두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고 덕천 개울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대형배수로를 내어 흐르게 하고 로타리에서 구포역까지 고가도로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구포시장 입구가 되어 장날이 되면 로타리일대 곳곳이 장터가 되었다.
그래서 덕천로타리는 4통 8달(四通八達)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된 것이다.
육로교통의 중심지인 이곳 덕천로타리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
1905년 경부선 철로가 놓여지기 전만하더라도 이곳은 덕천냇물과 구포대리천 냇물이 합쳐지는 하구(河口)지역으로 기찰이 있던 구법진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덕천로타리에서 현재의 광덕물산공장이 서 있는 만덕 입구까지 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 만덕에는 굉장한 규모의 만덕사 사찰이 있었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로 오고 갔던 고갯길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설인 것이다.
옛날의 뱃길이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하구쪽으로 밀려났지만 조선시대 기찰이 있던 구법진까지는 배가 드나들었음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덕천로타리 일대는 큰 비만 오면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왜정시대 논밭이 있었던 이곳 일대에 큰 물이 잠기면 의성고개 쪽에서 구포시장 입구 수문까지 배를 타고 오고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부선 철로에서 강쪽으로 대형 배수장을 설치하여 물난리를 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덕천로타리는 옛날 배가 드나들었던 곳임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끼게 한다.



연둥개와‘홍영감 도리 도리’이야기

옛날 배가 드나들었던 덕천로타리 일대 지명이 연둥개였다. 구포쪽으로 남창이 있던 언덕과 대리천제방 아래 시장사이의 하천 하구동네를 연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미루어볼 때 연둥개라는 지명은 연꽃과 관련된 갯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연둥개라고 하면 구포시람들은 어린 시절 멱을 감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옛날 기찰쪽으로 뱃길이었던 곳이 토사가 퇴적되어 논밭으로 변해 버리고 하천 폭은 좁혀졌으나 물길은 제법 깊었다.그래서 구포의 청소년들이 여름철만 되면 연둥개에 와서 멱을 감았다.
그리고 심심하면 개울 양 옆에 있는 논둑으로 올라 메뚜기도 잡고 잠자리도 쫓으면서, 미꾸라지도 잡는 등 온갖 장난질을 하다가 물에 풍덩 들어가기도 하면서 여름철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논엔 심어 놓은 나락이 밟히기도 하는 등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이곳 연둥개 일대의 논 주인은 구포시장에 살던 홍씨였다.
나이가 제법 들었던 홍씨는 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또 논 쪽으로 올라와 잡탕질을 하면 이를 쫓아내기 위해 고함을 치면서 달려 오곤했는데 아이들은 벌거벗은채로 도망가면서 ‘홍영감 도리 도리’ 소리를 치면서 어른 약을 올리곤 했다.
이 말이 구포에서 유행어가 되어 버렸는데 1950년대에서 60년대초까지 청소년기를 거친 구포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홍영감 도리 도리’ 이야기가 전해온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