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이동

광복 52주년을 맞으며

  • 1997-08-25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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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터 3·1운동은 조국광복의 밑거름”


선열들의 항일투쟁 오늘날까지 이어져
북구, 역사의 고장으로 길이 인식될 터

올해로 조국광복 52주년을 맞는다. 이날이 오면 조국광복을 위해 3·1독립운동을 일으켰던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우리고장 북구에서도 3월 29일(음력 2월 28일)구포장날을 맞아 구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고 또 사회신분으로는 교사, 면서기, 농민, 상인, 노동자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부산동래에서 일어난 의거의 주동체가 주로학생들로서 대부분이 시위운동에 그친데 비하여 굳센 저항을 발휘한 이곳 구포시장 의거는 이채로운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주동인물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군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의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주재소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증원된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구포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일제에 항거했던 많은 분들은 그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특히 광복의 그날까지 향토를 지키면서 민족의 얼을 일깨우는데 신명을 바쳤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구포장은 당시 음력 3, 8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정부의 세곡을 보관하던 남창 등 물자의 중요한 집산지이자 감동진나루터를 배경으로 한 교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하였으며, 서쪽으로 철로 건널목을 넘어 구포1파출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구포장터를 드나드는 나룻배가 정박했던 나루터 자리에는 그 뒤 낙동강 제방이 쌓이고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었으며 지금은 둑길을 따라 사상과 덕천로터리로 이어지는 산업도로와 고가도로가 개설돼 있는 가운데 옛날 남창(南倉) 자리에는 구포맨션이 들어섰고 그 옆에 100년 됨직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외로이서 있다. 또 장이 열렸던 골목들은 그대로있는 편이나 새로운 양옥들이 들어섰고 큰 장이 벌어졌던 넓은 공터에는 구포 1파출소가 위치해 있어 옛날의 장터로서 자취를 찾을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장한 발자취를 남겼던 선열들의 항일 투쟁 정신은 오늘날까지 북구인 모두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우리고장 출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은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구청은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거룩하고 자랑스런 구포장터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둑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또 구포향토회에서는 구포장터 3. 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조국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매년 광복절을 맞아 동대항 친선 축구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대회는 1947년 8월 15일 구포읍체육회(초대회장 박건자 낙동강소주주식회사 사장)가 결성되어 첫 친선대회를 가진데 이어 6·25동란인 1953년 광복절에는 피난해온 사람들이 부산에 집결해 있음으로 해서 전국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열들의 얼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북구는 역사의 고장으로 길이 인식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고장 선배들의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통일국가를 건설해 나가는데 온 힘을 모아 나가는 일이다.



◈ 북구 출신 독립 유공 수훈자 ◈

◎ 윤정은 (尹正殷) - 구포동
1852. 9. 8 ∼ 1920. 1. 19
― 건국훈장 애국장(1991년)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년 3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러던중 이듬해 1월 19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 임봉래(林鳳來) - 화명동
1890. 4. 22∼1968. 2. 15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김옥겸 (金玉兼) - 구포동
1892. 3. 19 ∼ 1957. 8. 30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독립선언서와 소형태극기 수백매를 제작, 구포 장날인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출동한 일경에 현장에서 피체되어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허치옥 (許致玉) - 구포동
1894. 10. 27 ∼ 1924. 9. 6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구포장날 독립만세때 1천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하다 일경에 피체,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김형기 (金炯璣) - 구포동
1896. 8. 9 ∼ 1950. 8. 20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중 재경유학생회 회장으로 학생대표가 되어 서울 탑동공원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3.1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서영석 (徐泳奭) - 금곡동
1925. 11. 24 ∼ 1963. 6. 25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1941년 일본대판에서 조선독립청년당에 가입하여 42년 3월1일을 기하여 조선독립선언 항일학생봉기를 추진하던중 일경에 탐지되어 피체,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김달수 (金達洙) - 구포동
1888. 11. 27 ∼ 1924. 12. 3
― 건국훈장 애족장(1995년)
구포장날 독립만세를 전개하다 함께한 11명의 인사가 일경에 붙잡히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투쟁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윤장수(尹章守) - 화명동
1895. 1. 6 ∼ 1958. 3. 20
― 대통령 표창(1995년)
구포장날 독립만세때 1천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하다 일경에 피체, 징역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 양태용 - 금곡동
1893 2. 24 ∼ 1937. 11. 15.
― 대통령표창(1997)
1919년 3월 30일 부산 동래군 구포시장에서 임봉래, 윤정은등과 같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기까지 미결기간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자료제공 : 부산지방보훈청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