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이동

청소년 생활수기- 일반부

  • 1997-09-25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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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투성이 작업화

박병희 / 부산대 법학과 1학년

1996년 11월, 나는 여느 고 3들과 다름없이 수능 시험을 쳤다. 그리고 연이어 세 차례의 논술고사와 면접 시험 때문에 바쁘게 쫓겨 다녔고, 1월의 어느 날을 마지막으로 나의 대학 입학 시험은 모두 끝이 났다. 그 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진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해방감에 그저 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고 뭐든 가능할 것 같았던 나의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늦잠을 자는 등 친구들을 만나 잡담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소일하다 보니 점점 나태해져 갔고, 아까운 시간들은 의미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소위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측량보조’이것이 내가 찾은 일거리였다. 아니 내가 찾았다기보다는 친척 어른의 소개로 하게 된 일이었다. 물론 이 외에도 일자리는 많았다. 중국집 배달부, 커피숍에서의 서빙, 세차장일 등. 그러나 좀더 건설적인 일이 하고 싶었고 결국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반여동의 컨테이너 공사장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레임과 돈도 돈이지만 처음하는 사회 생활에 대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는 학생의 신분이 아닌 일반인으로 사회에 나간다는 생각으로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묘한 기분과 함께 멋지게 해내리라는 결심을 안고 관리 사무실로 향했다.
첫 날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공사는 이미 많이 진척되어 있었고, 측량이라는 것이 원래 공사 시작전에 많이 필요한 것이지, 시작된 후에는 제대로 시공되었는지 가끔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내내 사무실에 있던 나는 심심해서 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멀리 아래쪽에서 아저씨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일도 않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던 터라 그쪽으로 가서 어저씨들을 따라 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폼’이라는것이었는데 콘크리트의 외형이 되는 거라 했다. 폼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어릴 때 운동을 해서 웬만큼 힘이 세다고 자부하던 나였으나 몇 개 옮기지도 못하고 헥헥거렸다. 아저씨들은 노련하게 잘도 옮겼다. 그렇게 이튿날이 지나갔다. 다음 날부터 내 일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른바 ‘잡부’일을 하게 된 것이다. 자재를 이리저리 옮기고, 철근 기술자가 부르면 철근을 갖다 주고, 목수가 부르면 목재를 갖다 주고, 콘크리트 레미콘 트럭이 오면 삽으로 여기저기 퍼 나르고. 특별한 기술은 필요 없지만 힘이 많이 들었다. 정작 어려웠던 것은 추위와의 싸움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공사장이 수영천 바로 곁에 있어서, 추위는 더 극심했다. 날짜가 지날수록 ‘그만하고 싶다’는 내부로부터의 갈등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하루는 추위 때문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서 락카통이 터지는 바람에 얼굴에 화상을 입은 아저씨를 보자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며칠간 그만두고 싶어 여러번 갈등했지만 꾹 참고 일을 나갔다. 자원해 놓고 먼저 관두겠다고 말하기가 쑥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쳤던 아저씨가 다시 와서 묵묵히 일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노동의 참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힘은 들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이윽고 마지막 날이 왔다. 일을 마치고 결국 해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을 안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는데 문득 구석에 벗어 놓은 작업화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와 흙이 묻어 엉망이었지만, 뒷굽이 다 닳아 없어져가지만, 못에 찔려 찢어지고 구멍이 났지만 내 눈에는 그 작업화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없었다. 내가 그만큼 열심히 일한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잘 보살펴주신 이 주임 님, 박 씨 아저씨, 그리고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주신 하 씨 아저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