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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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8 - 구포지역명산물(名産物)에 얽힌 이야기

  • 1997-09-25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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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 원장)


… 구포다릿목에 버스가 닿으면
… 구포역에 기차가 들어오면
… 부녀자들이 차창을 두드리면서
… 내 배 사이소! 내 딸 사이소!


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소! 내 딸!

8·15광복을 맞고 이어서 6·25가 일어난 후 구포다리 입구에는 헌병파견대가 설치되었고 60년대에 접어들어 동편 버스정류소 쪽으로 상권을 형성하여 구포관광센타 콘크리트건물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
구포 다릿목에는 그 당시 부산에서 김해, 마산 등을 지나 진해 쪽으로 가는 버스가 오르내리면서 정차하였다.
이곳에 버스가 닿으면 하나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아주머니, 아가씨 등 대부분 부녀자들이 광주리에 배를 담아 버스를 따라 붙으면서 “내 배 사이소! 내 배!” 외쳐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봄철이면 새빨갛게 익은 딸기 광주리를 들고 외치는 소리가 “내 딸 사이소! 내딸!”이었다. 이러한 풍경은 구포다리 입구 뿐이 아니었다.
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면 기차가 닿는 구포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차가 홈에 들어오면 부녀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차창을 두드리면서 “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이소 내 딸!”외쳐 대었다. 그래서 구포 배와 구포 딸기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명산물이 되었다.
그런데 배와 딸기로 유명한 구포에는 정작 배밭이나 딸기를 재배하는 밭이 단 한평도 없었다.
구포에서 생산되지도 않았던 배와 딸기가 왜 구포의 명산물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낙동강 하류의 물목이었던 구포의 지역적 특성을 알게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구포 배와 딸기 생산의 역사는 구한말(舊韓末)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일본이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동양척식회사는 한·일합방 후 김해 삼각주 일대 에 수리(水利)사업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이 이주해 와서 대저 출두리를 중심으로 배나무를 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 동쪽의 기름진 땅인 삼락 유두리 일대에도 원예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딸기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배와 딸기가 구포나루에 반출되어 구포역을 통하여 전국으로 운송되어 갔다. 이처럼 구포는 생산지는 아니었지만 생산물이 반출되는 집산지(集産地)로서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자연히 붙여진 이름이 구포 배와 구포 딸기가 된 것이다.
‘내 배 사이소! 내 배!, 내 딸 사소! 내 딸!’
봄철에는 딸기를, 가을과 겨울철에는 배를 사라고 외치던 소리가 구포에 대한 인상을 더욱 깊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녀자들이 딸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내 딸 사소’하니까 딸(女息)을 사라는 말이냐고 웃어 주었고 ‘내 배 사이소’하는 소리를 엉뚱한 뜻으로 해석하여 외지인들이 놀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60년대만 하더라도 봄철이 되면 삼락동의 낙동강 강변 둔치에서 딸기가 익을 무렵 주말이 되면 부산시민들이 구포다리에서부터 낙동강 제방 일대에 몰려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리고 가을철이 되면 구포다리를 건너거나 구포나루에서 다니던 김해 대동행 나룻배를 타고 대동면과 경계지점인 대저 출두리의 배밭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처럼 구포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배와 딸기가 구포를 통하여 반출됨으로써 구포배와 구포 딸기로 이름을 달렸던 시절도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지주(地主)들이 수익성이 높은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면서 그 이름도 차츰 사라져 갔다.


뭔가 맛이 다른 구포 국수 - 서민들이 즐겨 먹어

구포의 명산물 중에서 진짜 구포에서 생산되었던 것이 구포국수였다.
3일, 8일 장이 열렸던 구포장터의 중심부에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수공장들이 죽 들어서 있었는데 공장마다 뽑아낸 국수를 장대에 꽂아 길게 널어 놓은 모습은 실로 멋진 풍경이었다. 구포 국수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 직후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값이 싸고 배를 채우기에 적합한 국수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구포국수는 다른 지역에서 만든 국수보다 뭔가 맛이 달랐다. 약간 짠 듯한, 그리고 쫄깃쫄깃한 구포국수의 맛을 딴 지방에서는 그 비방을 흉내 낼수 없었다. 그 일미(一味) 때문에 국수라고 하면 으레 구포국수를 찾았다. 이 국수를 6·25 동란 직후 구포의 부녀자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볼박스에 넣어 머리에 이고 마산에서 오는 통근열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시내에 공급해 주었다.
이렇게 구포국수가 잘 팔리자 1959년 10월 구포장터에 있던 20개의 국수공장들이 구포건면(乾麵)조합을 결성하고 상표등록을 하여 국수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이후 구포국수는 여전히 생산, 판매되어 왔는데 1988년 시장에 있던 모 국수공장 주인이 구포국수를 단독으로 상표등록을 하여 다른 공장에서 구포국수 명칭을 못 쓰도록하여 소송이 일어 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재판부에서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산물로 역사성이 있는 명칭이므로 단독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구포국수는 영구히 구포의 명산물로서 그 명맥을 이어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구포지역에 2,3곳의 공장만 남아있어 그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디스토마균이 있어도 맛이 뛰어난 낙동강 잉어회

낙동강 하류 지역인 구포의 강줄기에서는 예로부터 잉어와 장어가 많이 잡혔다. 그래서 여기서 잡힌 고기로 영업을 하는 요리집이 많았다. 잉어는 구워서 먹어야 진미(珍味)가 있다고 했다. 잉어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용(龍)이 되기 위해 중국 황하(黃河)의 물살이 센 용문(龍門)에 모여든 잉어가 그곳을 뛰어 오르면 용(龍)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잉어는 이마에 점이 찍혀 물러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잉어 이마에는 점이 찍혀 있다고 한다.
‘잉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말이 있듯 잉어는 물살을 거슬러 뛰어 오른다. 그리고 잉어는 온수성(溫水性) 고기로서 겨울철 얼음 밑에서도 생존하지만 봄이 되어 수온(水溫)이 20도 이상되면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먹이를 찾게 된다.
여름철이 되면 차츰 수온이 높아지는 경우 37.8도까지는 능히 살지만 40℃를 넘으면 살지 못한다. 잉어의 몸 길이가 큰 것은 1m 가량이나 되며 몸은 방추형(紡錘形)으로 약간 측편(側扁)하고 주둥이는 둔한데 입가에 2쌍의 수염이 났으며 머리를 제외한 온몸은 둥근 비늘로 덮여있다. 낙동강 하류에서 잡히는 잉어는 디스토마균을 보유하고 있어 유역주민들이 잉어회를 먹고 간 디스토마나 폐 디스토마에 걸려 생명을 잃는 수가 많았다.그래도 잉어는 회를 쳐야 일미(一味)라고 하며 잉어회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잉어는 출산부(出産婦)들이 곰국을 해 먹는 보신제(補身劑)로서도 인기가 높다.


부산의 7진미(珍味)에 들어가는 장어구이

장어(長魚)는 뱀처럼 몸이 길고 매끈하여 뱀장어라고도 불리는데 살갗 밑에 매우 작은 비늘이 묻혀있고 지느러미에는 가시가 없는 고기이다. 다른 어류와는 달리 50년이 넘도록 사는 뱀장어는 스테미너를 돋워주는 탁월한 영양가 때문에 낙동강변의 어민은 물론 부산시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가격이 비싼 고급 식품인 뱀장어는 알을 낳기 위한 산란(産卵) 여행을 위해 9월 하순경부터 낙동강의 혈수역(穴水域)인 구포∼금곡 주변으로 몰렸다. 낙동강 상류쪽의 늪지대나 하천, 논 속에서 6년∼12년을 자란 뱀장어는 성어(成語)가 되어 여행을 시작한다. 염분(鹽分)이 없는 민물 속에서 반평생을 보낸 뱀장어가 산란장(産卵場)인 깊은 바다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체질을 바꾸어야만 된다. 이 고통스러운 훈련장이 바로 구포 일대의 낙동강이다.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올라 왔던 이곳은 염분농도(鹽分濃度)가 0.4∼1.6% 수준이었는데 뱀장어는 여기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체질변화 훈련을 한다.이때 소화기관이 퇴화(退化)되고 생식기관이 특히 성숙한다. 훈련은 첫 얼음이 어는 시기까지 계속되는데 탈락하는 것은 자손번식(子孫繁殖)도 못하고 일정 기간 살다가 죽는다. 이곳에서 훈련을 마친 뱀장어는 내장(內臟)이 바닷물에 적응할만큼 되는데 낙동강 하구(河口)에서 다시 2차 테스트를 해 보고 깊은 바다로의 여행에 들어간다. 3천∼4천 마일의 여행 끝에 뱀장어는 산란장이 있는 태평양 남지나(南支那)의 심해 산란장(深海 産卵場)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암수 뱀장어는 산란을 끝낸 후 모두 죽어 버린다. 고아로 태어난 수많은 뱀장어는 수심 500m 이상 되고 수온 섭씨 15도 내외의 따뜻한 곳에서 3년 가량의 치어기(稚魚期)를 보낸 후 어미들이 살던 낙동강으로 되돌아 온다.
김해 녹산 수문(水門) 근처에서는 매년 4월께면 어린 뱀장어(흰살 뱀장어)가 수 없이 몰려 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낙동강을 고향으로 한 뱀장어 떼다. 이곳 구포동에는 해방 이후 구포 선창 나루터에서 가건물을 짓고 잉어회와 장어구이를 팔던 요리집이 즐비했으나 1970년대에 철거되었고 금곡동 동원 마을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왔다. ‘장어 마을’로 지칭(指稱)되고 있는 이곳에는 20가구 중 16가구가 요리점을 열어 놓고 있는데 이 동네 요리집들이 부산의 7진미(珍味) 중의 하나인 장어구이 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의 음식점은 모두가 선대(先代)로부터 물려 받은 전통있는 음식 솜씨를 보유하고 있다. 민물장어 요리는 구워서 간장, 고추가루, 물엿, 마늘, 후추, 된장 등을 섞어 끓여 만든 독특한 기법의 양념장에 찍어 먹는데, 여기에 풋고추, 야채, 시금치, 통마늘이 뒤따르면 맛이 더욱 일품이다. 조리법은 장어뼈와 창자를 골라 내어 토막을 낸 뒤 1차 구이를 하고 양념을 발라 2차 구이를 해서 먹는다. 이 뱀장어는 보양(保養)식품으로써 특히 병환(病患) 후 회복을 위해 장어곰국을 해서 먹고 있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