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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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문화유산을 찾아서 23 - 구포

  • 1998-01-22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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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의 상징
주지봉(蛛蜘峰)과 범방산(泛舫山)

백이성(낙동향토문화원장)


구포의 주산(主山)은 주지봉(蛛蜘峰)이다.
강변쪽에서 바라보면 구포의 배산(背山)인 백양산(白楊山)이 우람하게 솟아있는데 시랑골과 음정골 쪽으로 뻗어나와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주지봉인 것이다. 그리고 백양산의 본산 줄기는 모라의 운수사 뒷산인 운수산을 거쳐 사상쪽으로 계속 뻗어내린다.
이와는 별도로 운수산에서 강변쪽으로 별도의 낮은 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이 산이 구포의 상징인 범방산(泛舫山)이다.
구포지역의 산세(山勢)를 살펴보면 상학산(上鶴山)에서 벋어내린 산 줄기가 동래로 넘어가던 만덕고개(其比峴) 능선을 거쳐 초읍쪽으로 넘던 부태고개(佛態嶺)를 깃점으로 사직동 쪽으로 금용산(金湧山)을 이루고 백양산 쪽으로 600미터 고지를 오르면 구포와 만덕을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뻗은 높이 614m의 주지봉이 솟아있다. 그리고 백양산의 본산 줄기는 정상에 넓은 평지를 이루면서 운수산 쪽으로 뻗어 사상의 배산(背山)으로서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우리고장 산이름의 유래
백양산으로 호칭되고 있는 이 산줄기는 조선시대 지도에는 선암산(仙岩山)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당감동 쪽으로 신라시대의 고찰(古刹)인 선암사가 있기때문에 붙여진 산 이름인 것이다.
운수산(雲水山)은 모라의 운수사 뒷산을 말하는데 조선시대 좌수영지(左水營誌) 병고조(兵庫條)의 기록에 나온다.
운수산은 병고(兵庫)라 하여 수군(水軍)의 군선(軍船)을 만드는데 사용할 나무를 얻기 위하여 민간인이 나무를 베어 쓰지 못하도록 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백양산은 산너머 초읍쪽으로 신라시대 백양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근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지역전체를 대표할 만한 연고가 약하지만 부르기에 친근감을 주므로 행정지명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산을 대별하여 보면 동쪽은 금용산(쇠미산), 서쪽은 운수산, 남쪽은 선암산, 북쪽은 백양산으로 호칭되고 있다.
그리고 구포쪽으로 주지봉이 있는 것이다.
구포의 주산(主山)인 주지봉(蛛蜘峰)은 산 정상에 마치 거미가 웅크린 모습의 암벽 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주지봉은 지도에 나타나 있는 백양산 정상의 높이인 642m와 거의 맞먹는 614m의 높은 봉우리인데 구포사람들에게는 조상대대로 불러 내려온 산이름인 것이다.
주지봉 아래 구포의 대리마을에서 당산제(堂山祭)를 올릴 때 주산(主山)인 주지봉의 산신(山神)께 먼저 마을의 태평을 빌어왔다.


주지봉 아래 시랑골의 폭포들
그리고 이곳 주지봉 아래 8부 능선의 암반이 있는 곳에 금샘이라는 샘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금샘이는 구포 대리천(大里川)의 발원샘이다. 이곳에서 흘러 내린 물이 금샘이의 지명과 연관이 있는 금수사(金水寺)에 이르고 밤나무 등대 골짜기에서부터 큰 도랑을 이룬다.
금수사 아래 쪽 계곡 언덕위에는 1920년대에 세운 척수정(滌水亭)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의 언덕 아래 암반 사이로 폭포가 그림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폭포가 바로 시랑골 폭포이다.
대리천의 상류쪽에는 시랑골 폭포아래 정새미 폭포, 참새미 폭포가 있었고 하류의 대리마을쪽으로 쏟아져 내리던 소당(沼堂)폭포가 있었다. 주지봉아래 이처럼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가 있었는데 시랑골 폭포와 소당폭포는 조선시대 기록에도 나오고 있다. 양산군지(梁山郡誌)감동진조(甘同津條)에 보면 복호폭(伏戶瀑)과 성불폭(成佛瀑)이 나온다.
복호폭포는 비학산(飛鶴山)밑에 있고 높이가 7장(丈)이며 성불폭포는 영산(嶺山)밑에 있으며 높이 20장(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08년 구한말 통감부(統監府) 철도관리국에서 간행한 「한국철도선로안내」라는 책자의 경부선 구포역의 소개란에 구포역의 동쪽 1리(里)쯤 되는 곳에 유명한 폭포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폭포는 서봉산(鼠峰山)기슭에 있는데 폭이 6척(尺)이고 폭포의 높이는 20척(尺)이며 폭포의 좌우에 큰 바위들이 있어 특히 여름철이면 그 청량(淸凉)한 경치를 보기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명승지가 되어 있다고 했다.
또 부근에 수정(水晶)이 나오는 호방산(虎方山)이 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나와있는 영산밑의 성불폭포에 대한 지명을 살펴보면 음정골에서 시랑골로 오르내리던 말등고개가 있는 산이 바로 영산(嶺山)인 것이며 고갯길을 오르던 산 등성이 아래에 있던 2단짜리 시랑골폭포가 바로 성불폭포인 것이다. 그리고 주지봉에서 벋어내린 산 줄기가 말등고개를 거쳐 대리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이 비학산(飛鶴山) 또는 서봉산(鼠峰山)이며 복호폭포는 소당폭포를 말하는 것이다.


구포의 명물 거북바위와 두꺼비 바위
구포의 상징인 범방산(泛舫山)은 구포의 구남 마을 뒷산을 말하는데 구포의 지명(地名)이 범방산의 형상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산군지에 보면 ‘범방산 한 줄기가 낙동강 끝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와 같다’고 기록되어있다. 산의 모습을 강변쪽에서 쳐다보면 거북이 머리와 몸체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
이 산을 구포사람들은 거북산이라고 부르는데 범방산이란 지명은 이곳의 호암골(虎巖谷)에 있던 범바위에서 유래한다. 범방산에는 거북바위도 있는데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이가 산을 오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범방산에서 서쪽 강변쪽으로 뻗어내린 곳에 야산(野山)이 있고 그 산 아래 철로변에는 구포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전해오는 두꺼비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두꺼비 형상의 눈과 턱이 조각을 한것처럼 분명히 나타나 보이며 집채처럼 큰 바위 덩어리가 두꺼비 몸체를 받치고 있어 더욱 신비감을 더해준다. 두꺼비 바위를 예로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존재로 믿고 치성(致誠)을 올려왔다. 경부선 철로가 바위 앞으로 가설되면서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엄청난 크기의 두꺼비 바위를 관상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이름난 구포의 명물이 된것이다. 지금은 이곳 주변에 공군부대의 기름탱크가 설치되고 보안유지를 위해 담장을 치면서 흙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고 있다.
1997년 12월 공군부대와 협의하여 구포2동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서 작업을 벌여 묻혀있던 두꺼비바위를 복원해 놓았다.
구남마을에서 두꺼비 바위가 있는 야산이 현재의 현대아파트 단지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옛날 이곳 언덕 위에 묘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우가 나온다고해서 야시고개라고 했다.
야시고개를 지나면 현재의 구포도서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봉우리가 있다. 이곳을 넘는 고개를 수리재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모라동 구역이다.
그리고 범방산 너머 운수사로 오르는 길목에는 어부랑 고개가 있다. 소를 몰고 이 고개를 넘다가 소가 굴러버릴 정도로 가파른 고개라서 몇사람이 어울려 넘어야 한다고 어부랑 고개가 되었다.



우리고장 전설 - 백양산 낭(郎) 바위
구포지역의 주산(主山)인 주지봉(蛛蜘峰)에서 백양산 본산 능선을 따라 가는 600m고지 정상에는 옛날 신라의 화랑(花郞)들이 말을 타고 훈련을 했다는 평평한 벌판이 펼쳐지고 있다. 이곳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화랑들이 찾아 온 곳이라 화랑바위, 낭(郎)바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바위는 원래 농바위라는 이야기가 있다.
모양이 농(옷장)처럼 생긴 네모진 바위인데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온 천지가 물에 잠길 때 이 바위만은 농처럼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농바위라는 것이다.
이 농바위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여름철에 가뭄이 심할 때 구포사람들이 한밤중에 올라와 농바위 앞에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소나무를 베어다 불에 태우면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이렇게 나무를 태우면 솟아오르는 연기가 꼭 구름처럼 하늘에 번져갔는데 기우제(祈雨祭)를 올린 후 3, 4일이 지나면 반드시 큰 비가 왔다고 한다.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의 물줄기가 12골인데 비가 쏟아지면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길의 흐름이 꼭 백마가 내려 오는 것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