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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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자연마을 / 금곡·화명지역

  • 2024-02-27 09:28:07
  • 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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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자연마을 / 금곡·화명지역

우리구 자연마을 / 금곡·화명지역
율리바위그늘유적 등에 사람 살았던 흔적
 
◇율리(栗里)마을=금곡동 율리는 마을에 밤(栗)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으로 북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던 율리바위그늘유적이 있는 곳이다. 1972년 부산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에서 신석기 말기의 빗살무늬토기와 바위그늘자리, 적석유구 등이 발견되어 2013년 부산시 문화재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알터(性穴)바위와 당산나무가 남아있으며,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의 정려비가 양산 유림의 추천으로 1872년 세워졌으나 도로 확장으로 금곡청소년수련원에 옮겨져 있다.
◇화명(華明)의 유래=화명동은 금정산과 상학산 끝 봉우리인 화산(華山)과 그 아래 명당(明堂)이라는 명칭이 합쳐져 만들어졌으며 1914년 동래군 구포면 화명리로 공식 지명이 나타난다. 자연마을로 대천(大川), 와석(臥石), 용당(龍塘), 수정(水亭) 4개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대천(大川)마을=금정산 고당봉 북문재와 상학산 줄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해 큰 냇물이 마을 한 가운데로 흘러내려 붙여진 지명으로 냇물을 중심으로 양달마을과 음달마을로 나누어진다.
냇물이 흘러가는 웅덩이 중 가장 깊은 폭포가 애기소(沼)이고, 처음 대천에 사람이 살았던 곳은 탑거리(塔巨里, 현 변전소와 화명정수장 뒷등 일대) 일대로 추정된다.
조선 병자호란(1636년)때 척화파 성균관 진사 윤소 선생이 이 마을로 귀양오게 되어 1640년경 파평 윤씨 문중이 정착하면서부터 1720년경 창원 정씨, 1780년경 경주 최씨, 1800년 초 안동 권씨 문중 등이 살아온 흔적이 문중 기록에 남아있다. 그리고 곡선으로 꺾여 용당쪽으로 흐르던 대천을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주민들의 자력으로 직강(直江)으로 흐르게 하면서 백포원 들판을 옥답(玉畓)으로 만들었다. 1930년 10월 건립된 장우석 기념비가 그 역사를 증명하여 주고 있다.
◇와석(臥石)마을=와석은 화산 신선덤 봉우리가 신선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근세에는 화잠(華岑)이라고 한다. 상학산 북쪽 암봉(岩峰) 베틀굴에 미륵불상이 있으며, 가락국 공주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베를 짜면서 기도하였다는 전설과 1908년 화명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나라의 인재를 길렀다는 역사가 전해온다.
그리고 평택 임씨 임회 선생은 1613년 이 곳으로 유배되어 있는 동안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정착하였으며 전주 류씨, 청주 양씨 문중 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희망북구 편집위원

최종수정일2020-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