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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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7 - 화명동

  • 1997-07-25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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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동 화잠(華岑)마을과 대밭골 호투장(虎鬪場)

화명동(華明洞 화잠(華岑)마을은 상학산(上鶴山) 북쪽 정상 베틀굴에서 큰 골 작은 골을 끼고 수반천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함박봉과 이어지는 산 아래의 마을이다. 남쪽으로 수정마을과 경계를 하고 북쪽으로 대천마을과 접해있는 화잠마을의 원 지명은 와석(臥石)이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로 나와 있으나 근세에 화잠으로 지명을 바꾼 마을이다. 와석(臥石)이란 지명은 돌이 누워있는 동네라는 뜻이라서 동네의 주산(主山)인 화산(華山)의 묏부리(峯)란 뜻의 화잠(華岑)으로 고친 것이다.
와석마을은 화명의 중심 동네로서 예로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현 북부산변전소 아래 화명정수장 남동쪽 뒷등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주거단지로 개발 되고 있는이곳은 현재의 마을에서 500여미터 위쪽 산 아래쪽으로서 건설장비가 밀어 붙이는 현장에서 분청사기, 백자 등 도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화명성당 뒤쪽 논이 있는 곳에 200년 된 당산나무가 있다가 말라죽었는데 이를 보더라도 이 일대가 옛 마을터임이 증명되고 있다.


상학산 베틀굴의 미륵불

상학산(上鶴山) 정상의 북쪽 암벽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두곳의 암굴(岩窟)이 있는데 이곳을 베틀굴이라고 부른다.
암굴 속에는 부처 형상의 바위가 모셔져 있는데 이 부처가 바로 미륵(彌勒)신앙에서 생겨난 미륵불이다.
이곳에는 할머니 한분이 미륵불과 함께 암굴 속에서 30년이 넘도록 수도생활을 해 왔는데 얼마전에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곳 상학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수반천(水盤川)은 안창 바위골 뒷골물을 합하여 와석마을 뒤쪽을 지나 용동골로 흘러내려 대천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함박봉 아래 흥아타이어가 있던 곳과 와석 본 동네사이로 작은 개천이 흘러내리는데 이곳에 당집이 있어 당집골이라고 부른다.
와석마을의 배경에는 함박봉아래 너덜지대인 채이들겅이 있고 동네에서 관리하던 야산(野山)이 있다.
서당에서 관리하고 서당산과 동네 토박이인 임씨, 류씨, 양씨 문중산이 있는 재등이 있고 옛날 농사를 짓던 두레 모임에서 소유한 농천산이 있다. 그리고 사립화명학교가 있었던 곳이 학교등인데 현재의 우신아파트자리이다.
흥아공업공장이 있던 곳의 아래에는 옛날 뱀이 많았던 배암골이란 골짜기가 있고 북부산 변전소 뒤에는 영장등이라는 언덕이 있다.
뒤쪽 깊은 골짜기를 대밭골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옛날 호랑이가 나왔다고 한다.
대밭골 입구에는 동네사람들이 나무를하러가면서 쉬어가던 아리랑 고개가 있다.


천국부(千國富)가 살았던 마을

와석마을의 철길과 도랑사이에는 조선시대 배를 가지고 소금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던 천국부(千國富)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는 장터껄이 있는데 천국부 한 사람의 재력으로 장(場)이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만큼 와석마을은 천국부의 집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할만큼 큰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국부(國富)라는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천국부는 이곳에 엄청나게 큰집을 새로 지었는데 그 뒤 어떤 연유에서인지 망해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와석마을에는 천국부의 집터가 있고 그 후손들은 사상쪽으로 이주해 갔다고 한다.


사립화명학교 설립의 역사

와석마을의 학교등에서 1908년 민족학교인 사립화명학교(私立華明學校)가 설립되었다.
화명학교는 전통적인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항일(抗日)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동네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설립했던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윤경, 임봉래, 양봉근 세분이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독립 만세운동의 주역을 맡았다.
그만큼 화명동은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일제시대 항일운동 지사들이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들 정도로 독립자금을 내 놓는 성의와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장우석(張禹錫)선생 기념비

와석마을에는 새로운 양옥들이 계속 들어섰는데 동네어귀에 소나무와 비석이 어우러져 있는 소공원같은 공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에는 화명출신의 선각자였던 장우석(張禹錫)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옛날 대천 아랫들인 백포원(白浦園)벌판을 보호하기 위해 대천천 물을 직선으로 흐르도록 모래둑을 쌓았는데 이 둑을 쌓아 보존하는데 항상 앞장서서 재정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주었던 장우석 선생의 공덕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하여 1930년 10월에 백포원 들판에서 농사를 짓던 지주와 소작인들이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장우석 선생은 1906년 구포사립구명학교를 발족시켜 초대교장을 역임하였고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1913년 지방에서 최초로 구포은행을 설립했던 향토의 선각자로서 부산의 역사적 인물이다.


대밭골 호투장(虎鬪場)의 전설

상학산(上鶴山)을 이곳 주민들은 학(鶴)이 남쪽과 북쪽 봉우리를 따라 양 날개를 편 형상이라 쌍학산이라고 한다.
상학산의 북쪽 끝 봉우리를 화산(華山)이라고 부른다
상학산의 북쪽 봉우리는 가파르고 유수한 충적암이 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산의 8부능선에는 장사가 앉았던 엉덩이 표적과 발자국이 있는 장사바위가 있다.
장사바위 아래 돌 언덕(덤)에는 수정돌이 나오는 수정골이 있다. 이처럼 전체가 암반으로 형성된 산을 쳐다보며 살아 온 마을 아래 동네로서 와석(臥石)이란 마을의 지명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화산아래 대밭골 하곡쪽 산골 도랑 옆에 평지가 있는데 이곳이 호투장(虎鬪場)으로 호랑이가 싸우던 곳이다.
대밭골은 현재의 북부산 변전소 뒤쪽 대가 많이 자라던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 산골 도랑 옆에 평지에서 호랑이가 싸웠다고 한다. 예로부터 어느 산골이든 주산신령(主山神靈)있다.그러다가 타산(他山)에서 온 난달(떠돌이 호랑이)이 들어오면 본산 신령이 크게 소리를 높여 울어 산 아래 마을사람들에게 난달이 들어왔으니 호환(虎患)을 당하지 말도록 경고를 하고 자신은 난달과 최후의 일전(一戰)을 벌인다.
다행히 본산신령이 이기면 난달은 달아나고 만약에 지게되면 3일동안 산천을 떠돌며 슬피울다가 타산(他山)으로 떠난다. 그리고 결투에서 이긴 난달이 이 산을 영유(領有)하여 주산신령이 되는데 당분간 산 아래 주민들은 조심하여야 하고 입산(入山)을 삼가하여야 한다.
옛날 산골 주민들이 왕왕 호식(虎食)을 당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이는 타산에서 침입한 난달에게 당한 것이다. 주산신령이 강하면 절대로 호환(虎患)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항시 본산신령에게 지내는 산신제(山神祭)를 정성껏 지냈다. 화명의 대밭골 아래 호투장(虎鬪場)은 본산신령과 난달이 싸웠던 곳으로 이야기가 전해온다.

최종수정일2020-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