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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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22 - 만덕동

  • 1997-11-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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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동(萬德洞) 지명의 유래

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 원장)


만덕사와 만덕고개에 얽힌 지명

만덕동(萬德洞)이라는 지명(地名)은 어디에서 유래(由來)한 것일까?
먼저 그 어원을 만덕사(萬德寺)라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던 절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한 만덕사의 내력은 오직 하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이른바 석기 왕자의 왕위추대음모사건과 관련된 기록 속에 나오고 있다. 이 기록들에 나오는 충혜왕(忠蕙王)의 서자(庶子) 석기(釋器)가 만덕사에 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공민왕 5년에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음모사건과 관련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문헌(文獻)에 석기(釋器)가 유폐(幽閉)되었던 절이 만덕사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절의 내력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만덕동의 큰 절터 유적과 유물들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고려사에 나오는 석기 추대 음모사건과 관련된 만덕사가 만덕동에 있는 절터라는 데에 귀착하게 된다. 그래서 만덕동의 명칭은 현재의 만덕 제1터널 입구 좌측 산쪽에 있는 사기(寺基-절터) 마을에 있는 만덕사(萬德寺)에 그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만덕동 뒷산에 임진왜란 때 만명(萬名)의 피난민이 와서 피신했다고 만덕동이라고 했다는 설(說)도 있는데 그것은 근거가 확실치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고갯길에는 도둑들이 들끓어 여기를 오르내리던 장꾼들의 물품을 털어갔는데 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넘어야 했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그 이름이 만덕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이곳 만덕사에 많은 승병(僧兵)이 운집(雲集)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만덕이란 말은 결국 만덕사와 관련하여 생긴 이름으로 넓은 절터에 만명(萬名)의 대덕(大德-스님)이 와서 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는 것이다.


만덕사 절터와 관련된 지명들

‘만덕사 옛 절터’란 뜻의 사기(寺基)마을은 현재 만덕 제1터널 입구 좌측에 있는 마을을 이야기한다.
이곳에는 만덕사 금당지(金堂址)가 폐사된지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왔다. 그러나 금당지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장방형의 큰 바위들로 쌓아올린 대형 석축은 이 절터가 고려시대의 국찰에 버금가는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지역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모두 만덕사와 연관된 것이 많다. 먼저 만덕사의 안산(案山)은 비룡산(飛龍山)이다.
용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비룡산은 풍수지리상 명산이다. 그리고 만덕사가 명당자리임을 나타내주는 좌청룡우백호의 풍수에 맞추어 만덕사의 서쪽 강변쪽을 가로 막고 있는 산이 용을산(龍乙山)이다.
옛날 상계봉 골짜기에서 용을산 너머로 흘러내리던 물을 용의 등허리를 잘라 만덕사쪽으로 흐르게 했다는 용호골의 전설은 용을산의 주름을 자른 후 절쪽으로 흘러내렸다는 용을그렁(도랑)의 지형을 살펴보면 신비함을 느끼게한다.
만덕사의 위쪽 개울가에는 차밭골이 있는데 만덕사에 선승(禪僧)들이 주석하면서 마시던 선다(禪茶)의 내력을 증명해주는 지명이다.
이곳 차밭골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가 군생(群生)하고 있는데 꽃이 좋고 열매가 둥글둥글하게 열리고 있다.
계곡 위쪽의 소나무 밭에는 떡매바우라는 홈이파인 바위가 있다. 이는 만덕사에서 수조(水漕)로 쓰기위해 제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돌인데 만덕사람들이 평평하게 파인 돌 모양을 보고 옛날 만덕사에서 떡매를 치던 돌이라고 ‘떡매바우, 덕전걸바우, 떡구시바우’라는 이름을 붙였다.
절터였던 곳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논을 갈기위하여 논빼미 옆에 만덕사 3층 석탑 2기(基)가 허물어진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한곳에 모두어 놓았다고 이곳을 탑빼미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재의 만덕터널 앞 도로 아래쪽에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개따껄이라고 부른다. 동네아이들이 당간지주 옆에 있던 동네 당산의 포구나무 있는 곳을 갈때는 개따껄 간다고 했는대 개따껄이란 이름은 당간지주에 사찰을 상징하여 내걸던 깃대가 있는 곳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만덕사와 연관된 지명은 이곳 사기 마을 말고도 만덕지역의 곳곳에 남아있다.
동래로 넘어가던 만덕고개가 바로 만덕사에서 연유한 지명이요, 옛날 만덕에서 초읍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부태고개, 불태령(佛態嶺)이라고 하는데 이 고개의 이름 속에 부처님의 모습이란 뜻이 담긴 것을 봐도 만덕사와 연관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제 만덕사 금당지에서 정면으로 쳐다보면 안산(案山)인 비룡산이 보이고 그 비룡산 너머 정면으로 불태령이 쳐다보인다.
조선시대 양산군지, 동래부지의 기록에 보면 만덕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덕천(德川) 냇물을 만덕계수(萬德溪水)라고 한 것을 보아도 만덕이란 지명이 오랫동안 전해오는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만덕계수가 흘러내리다가 현재의 신만덕 중소기업청이 있는 곳의 위쪽 100여 미터 지점에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웅덩이의 이름이 중시골이고 이곳에 있던 큰 바위가 중시골 바우였다.
글 뜻대로 만덕사 스님들이 목욕하던 곳이라서 중시골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만덕 계곡물이 흘러 내리는 남산정 마을의 북쪽산에는 기와골이란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의 이름을 보면 고려시대 엄청난 규모의 큰 사찰이었던 만덕사의 기와를 이곳에서 생산해서 보급한 곳으로 추정된다.
절터 앞에 길게 벋어내린 능선을 길다고 진등(長丘)이라고 하는데 사기마을과 상리마을의 중간지점인 이 계곡평야에 끝이 갈린 원추형(圓錐形)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북채로 북을 친다는 북바위이며 이 계곡을 북설이라고 한다. 이 북바위의 전설도 만덕사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만덕사는 사찰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절에서 쌀을 씻는 뜨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 낙동강까지 하얗게 떠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만덕사는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만덕동 일대의 곳곳에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는 것이다.



● 우리고장 전설

만덕고개와 빼빼영감

동래 남문(南門)밖에 동래와 구포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삿자리 장사를 하며 생계(生計)를 이어가던 홀아비가 살았다.
성(姓)도 이름도 없이 빼빼영감으로 통하는 이 삿자리 장사는 어찌나 여위고 피골(彼骨)이 상접(相接)하였던지 성내(城內)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이 영감이 하루는 구포장에 갔다가 여러 장꾼들과 함께 험한 만덕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고개는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이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부터 동래부(東萊府) 관아에선 최대의 도적들 소굴이었으니, 지금 양정동(楊亭洞)의 마비현(馬飛峴=모너머고개) 화적떼도 이 무리에 비하면 문제가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만덕고개를 ‘만등고개’로도 불렀는데 만(萬)사람이 무리를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만덕 고갯길을 빼빼영감과 장꾼들이 구포장을 보고 동래로 돌아가면서 고개마루에 있는 주막에 앉아 잠시쉬게 되었다.
이때 별안간 10여명의 도적떼가 뛰어들면서
“꼼짝마라! 움직이면 죽인다”라고 사나운 얼굴을 지으며 장꾼들을 한사람씩 묶어버렸다. 그리고 두목이 나서서 물건을 판 돈과 가진것들은 모조리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때 빼빼영감이 감연히 앞으로 나서서 도적을 향하여,
“여기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나돌아 다니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될 것이 아니옵니까?”라고 애걸(哀乞)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적들은 이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
“이놈!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하면서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더니 땅바닥 위에 쓰러 뜨렸다. 영감은 봉변을 당하고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이놈들!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면서 눈에는 살기(殺氣)가 등등하였다.
도적들의 시선이 빼빼영감에게 쏠렸을 땐 벌써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 이놈을 때리고 저놈을 밀어 넘어뜨리는 그 솜씨는 비호같이 날쌨다. 이 비상한 완력에 감당할 수 없었던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자 그는 묶인 장꾼들을 한 사람씩 모두 풀어주었다.
이때 힘을 얻은 장꾼들은 다쳐서 못달아난 도적들을 잡아 동래로 가자고 했으나 그는 “우리들에게 소득이 없는 일이라면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 그 자들은 이젠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술이나 한잔 합시다”라고 하면서 술과 안주를 있는대로 다 가져오라고 주모(酒母)에게 청했다.
“여러분! 이 술은 모두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 난 이야기만은 절대하지 말도록 거듭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했다.
술 대접까지 잘 받은 장꾼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의 한 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아드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자 나라에서는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최종수정일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