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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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토 문 화 기 행 - 금정산성을 지켰던 국청사와 해월사

  • 2001-09-27 00:00:00
  •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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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종조의 기록을 보면 금정산성내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와 해월사(海月寺)의 승병(僧兵) 100여명과 범어사의 승려 300명으로 성을 수비케 하고 동래, 양산, 기장 3읍에 있는 사찰과 암자의 승려 수천명으로 승병 작대(作隊)를 편성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의 방어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고 한다.
동래부지(1740년 편찬)의 군총조에 포함된 승군 작대는 316명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승장군기(僧將軍器)로 흑각궁(黑角弓), 간각궁(間角弓), 창, 장전(長箭), 인기(認旗), 수기(手旗), 영기(令旗), 기총기(旗摠旗), 대장기(隊長旗), 순시기(巡視旗)의 보유 수량이 나와 있다.
1703년에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작대의 승영(僧營)으로서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다.
현재 국청사에는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僧將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철제인(鐵製印)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국청사가 조선시대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僧兵將)이 집전하여 승군 작대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사령부격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국청사와 함께 산성을 지켰던 해월사(海月寺)는 어디에 위치한 사찰이었을까?
<동래부지> 불우(佛宇)조에는 ‘해월사는 남문내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세기 말의 <동래읍지>에는 북문내에 위치한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해월사는 현존하는 미륵암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엇갈리는 기록들 때문에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해월사 절터는 고당봉 아래 사싯골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35년경에 만들어진 <해동지도>에 동래부 관하 해월사의 위치를 현재 부산교육원이 있는 언저리쯤으로 나와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는 유적과 유물들이 최근에 발견된 바 있다.
그것은 자연석탑과 멧돌, 돌절구 등이며 정수암이란 암자에 보존되어 있는 현판 2장이 이 일대가 해월사 절터 였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부산교육원의 동쪽 언저리에서 발견된 자연석탑은 상단부가 반쯤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고 맷돌은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돌절구 등 유물이 발견 되었는데 이곳 일대가 지난날 논밭으로 변하여 더 이상의 절터 확인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 자연석탑이 있는 인근에 정수암이란 조그만 암자가 있다.
이 암자에서 현판 2장이 발견되어 해월사에 대한 자료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수암 독성각에서 나온 현판에는 ‘해월불우경영(海月佛宇經營)’이라고 적혀 있어 이 현판이 해월사의 상량기문임을 알수 있게 해준다.
상량기문에 의하면 ‘1708년(숙종 34년, 강희 47년) 4월9일에 중창…… 기둥이 썩고 기와가 오래되어 비가 새 신도들이 보시로 불사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의 해월사 중창 상량기문에는 ‘1745년(영조21년, 건륭 10년) 9월3일에 건물을 헐어 새롭게 증축했다’고 적혀 있다.
이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 정수암이 옛날의 해월사 본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옛날의 절터가 인근에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자료로 보고 있다.
호국의 일념으로 산성을 지켰던 국청사와 해월사 스님들의 행적은 이제 오랜 세월 속에 묻혀버린 옛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