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이동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5 - 개화기 지방최초로 설립된 구포은행

  • 1999-04-26 00:00:00
  • admin
  • 조회수 : 815

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구포의 경제 및 지리적 배경

구포는 대구, 마산, 진주등 경남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소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일찍부터 객주업이 발달하고 또 한국최초의 지방금융기관이 설림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중요지이며 특히 경부철도가 개통될 때까지 구포와 하단포에는 부산에 수송되는 물산의 집산지였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상주, 왜관, 삼랑진을 잇는 중요 수송로로써 옛날부터 경남평야의 농산물을 광선에 적재하여 구포와 하단포에 운반했던 것이며, 부산 및 김해지역의 해산물 역시 이 광선으로 낙동강 상류에 운반되었다. 특히 부산개항 이래 다량의 미곡이 부산항으로 부터 일본에 수출되었고 부산에 수입된 양화도 이 강을 통하여 지방에 배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낙동강이 운송로로서의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는 한 구포와 하단포는 물산집산의 요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산에 유입하는 강구로서의 이 두 포구중 하단포는 해류의 변조가 심하여 물산집산지로서는 불편이 적지 않았으며 따라서 구포가 물산집산지로서 보다 중요성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말의 구포에는 다수의 객주가 모여들어 한때 상당한 번창을 이루고 있었다. 구포에서 근대적 금융기관이 가장 일찍이 설립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금융기관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설립 (1908년)
구포가 한국의 민족계 지방은행의 발상지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흔히 한국지방은행의 선구는 구포은행이라고 한다. 이 구포은행은 1912년 6월에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구포은행이 설립되기 전에 구포에는 이미 저축주식회사라는 금융기관이 있었으며, 이 회사는 예금 및 대금업, 어음할인업 등 근대 은행 업무와 별차가 없는 일종의 금융기관이었다. 이 구포저축주식회사는 이미 1908년(융희2년)에 설립된 것으로서 이 회사를 한국 지방금융기관의 선구라고 볼 수 있다.
이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구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물산 객주와 지주 70여명이 합자하여 자본금 2만5천원으로 창립되었으며, 창립 당초의 역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취체역사장-장우석, 취체역-윤상은, 전석준
지배인 -신영조, 감사역-강신호, 강래원
이 구포저축주식회사는 설립 이래 영업이 번창하여 짐에 따라 1911년 12월에는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이 회사를 은행으로 개편할것을 결의했다.


설립을 주도한 장우석과 윤상은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설립을 주동한 사람은 장우석과 윤상은이며, 특히 윤상은은 회사설립의 실질적인 산파역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회사가 뒤에 은행으로 발전함에 있어서도 그의 착상과 노력이 컸던것이다.
장우석은 구포의 물산객주로서 한말의 미곡 대일수출에서 거부가 된 사람이며, 윤상은 집안은 구포의 대지주로서 당시 만석군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장우석과 윤상은은 한 고장의 이웃마을에 살고 있어 양가는 오랜 세교를 가졌고, 장우석은 윤상은의 부친인 윤홍석과는 평소 친교가 두터운 사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윤상은은 장우석의 아들 장진원과 동년배로서 친교가 두터운 사이였으므로 장우석의 사랑방에서 자주 소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창립에 관여하게된 것이다.
윤상은은 당시 약관 23세였으나 그는 개성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동래감리서에서 관리생활을 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그는 근대적 금융기관의 필요성과 이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장우석은 윤상은의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그의 신지식과 식견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사업상의 일도 자주 그와 상의하게 된 것이다.
윤상은이 향리에 체류하고 있던 당시 구포의 객주들 사이에는 「저축계」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 저축계가 모체가 되어 발전한 것이 저축주식회사였다. 이 저축주식회사의 설립에서 주역을 담당한 것은 장우석과 윤상은이었다.


지방 최초의 구포은행 설립 (1912년)

구포저축주식회사가 구포은행으로 개편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1911년 1월 1일로 공포 실시된 조선회사령에 있었다.
조선회사령은 한일합병후 조선내에는 근대적 공업건설을 억제할 목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조선내에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령의 발효와 더불어 기설회사는 모두 당국에 다시 신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회사령에 의하면 기설회사는 새로 허가를 얻을 필요는 없고 신고를 하였는데 조건을 붙여 인가 받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구포저축주식회사도 이 회사령에 따라 신고서류를 구비하여 당국에 제출했다.
당시 당국에서는 이 회사는 사설회사로서 금융대부업은 할 수 있으나 예금업은 은행업무와 상충된다 하여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이와 같은 난관에 부딪쳐 구포저축주식회사는 은행으로 개편함으로써 난관을 타개할 것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를 은행으로 개편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본을 증자해야 하고 둘째로는 회사령에 따라 새로이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와같은 일은 모두 윤상은이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은행설립에 소요되는 자본 조달을 위하여 장우석의 협조를 얻어 경남 일대의 지주와 상인의 설득에 나섰다. 또 은행설립에 필요한 서류 일체를 손수 작성 구비하여 수차 상경, 총독부 당국과 교섭해야 했던 것이다. 이 허가서류에 필요한 장부 조직에 대해서는 당시 한일은행에 재직하고 있던 문상우의 조력이 컸다고 윤상은은 회고한바 있다.
구포은행은 1912년 6월 23일부로 설립 허가를 얻게 되었으며, 자본금 50만원의 한국 최초의 만족계 지방은행이 탄생을 보게 된것이다. 이 은행의 설립과 더불어 구포저축주식회사는 발전적인 해산을 단행했고 동 회사의 자금 일체는 구포은행에 인계되었다.
구포은행은 동년 9월 21일부터 영업을 개시했으며 익년 3월 1일에는 부산지점을 개설했다. 그러나 구포저축주식회사가 구포은행으로 개편됨에 따라 주주 및 역원에 큰 변동이 있었다.
구포은행은 자본금 50만원, 1주당 50원, 총주수 240명으로 발족했으며 우선 대주주의 변동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색을 볼 수 있다.
첫째로 부산의 거상들이 대주주로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구포은행의 발족과 더불어 다수의 일본인자본가가 참가했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셋째로는 구포저축주식회사에서는 대주주였고 또 주요한 역원으로 활약하던 사람들은 이 구포은행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주주의 구성은 구포은행의 역원 선임에도 반영되었다. 개편당시의 역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두취취체역-이규직, 전무취체역-장우석
취체역-김복태·윤병준, 감사역-윤상은
(주식회사 구포은행 제1기 영업보고서 참조)
이상 주주 및 역원구성을 보면 구포은행의 주동 세력은 이미 부산으로 옮겨져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경남은행으로 발전 부산시내로 진출

경부선 개통이래 수송로로서의 낙동강의 중요성은 점차 상실되고 따라서 물화집산처로서 구포의 지위는 자연 약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구포은행은 1915년 1월 24일로 지방 소읍의 명칭을 탈피해버리고 경남은행으로 개칭하면서 본점을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따라서 구포 본점은 지점으로 격하 되었다. 경남은행은 본점을 부산에 옮긴 후 영업도 순조로히 진행되어 1918년 8월 7일에는 마산에 지점을 개설하고 동년 11월 9일에는 하동지점을 개설하였다. 또 동년 12월 26일에는 전석준, 김홍조등이 발기인이 되어 새로 발족했던 주일은행을 흡수하고 총자본금 1백만원으로 증자함으로써 영남 최대의 민족계은행으로 발전한 것이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