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이동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3 - 충신과 효자·열녀비의 내력

  • 1999-02-25 00:00:00
  • admin
  • 조회수 : 868


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우리 고장에 전해 내려오는 충신과 효자·열녀비 유적은 만덕동에 있는 김기장군 묘갈명과 금곡동에 있는 효자 천승호와 열녀이씨 정려비가 있다.
그중에서 만덕동 만덕사의 풍수지리상 우백호인 용을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김기장군의 묘소는 소나무 숲속에 가려져 있어 주민들이 쉽게 찾을수 없는 실정이다.
금곡동에 있는 효자 천승호와 열녀이씨 정려비는 원래 금곡율리마을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금곡중학교앞 소공원으로 옮겨 세워놓고 있다.


임진왜란 공신 김기(金琦)장군 묘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동래(東萊)출신의 의병(義兵)으로 죽은 뒤에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추증(追贈)된 김기(金琦)공의 묘가 만덕동에 있고 묘비(墓碑)에는 그 공적이 실려있고 묘비(墓碑)의 규모는 높이 1.33m, 폭 34cm, 두께 11cm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東萊)지방의 의병활동에 관해서는 충렬사지(忠烈祠志) 부록 2 별전공신록(別典功臣錄)에 그 대강이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포공(褒功)될 24공신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 판관(判官) 김기(金琦)장군이다.
김기(金琦)장군에 관한 기록을 보면 ‘壬辰變亂以後 本府人竝爲潰散時 終不背官’이라고 되어있으니 임진란(壬辰亂)이후 본부인(本府人=東萊府사람)이 모두 전투에 져서 뿔뿔이 흩어질 때 끝내 관(官)에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기장군 묘소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公生得忠義根天 英邁絶人 當壬亂 人皆離散 公以判官 終不背官 與倡義功臣二十四人 竝力討賊公亦同功之一也 自朝家旌寶褒 贈繕工監副正加 贈禦侮將軍 訓鍊院僉正 聖朝崇報至矣 及歿萬德九岩子坐原 配延安李氏麗明女合塋 (後略)
공의 휘(諱)는 기(琦)이고 자(字)는 화경(和卿)이며 관(貫)은 광주(廣州)이다. (중략)
공은 나면서 충의(忠義)함이 하늘에서 뿌리 박은 듯 하였으며 영민(英敏)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임난(壬亂)을 당하여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으나 공은 판관(判官)으로서 끝내 직분을 버리지 아니하고 창의공신(倡義功臣) 24인과 더불어 힘을 모아 적을 토벌하셨으니 공 역시 함께 공(功)을 세움이 하나이다. 조정에서 공적을 표창하여 선공감부정가(繕工監副正加)의 벼슬과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의 벼슬을 내리셨으니 성조(聖朝)의 큰 보답이 지극함이라. 죽음에 미쳐 만덕(萬德) 구암(九岩)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내고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 여명(麗明)의 딸과 합장하였다.(후략)


효자 천승호(千乘昊)와 열녀 이씨(李氏) 효열(孝烈) 이야기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의 효행은 1872년 나라에서 교지를 내려 금곡동에 정려비를 세운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서 양산군 유림들이 군수에게 올린 추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효자 천승호는 선비 집안의 전통은 이어받아 시례(詩禮)의 풍(風)과 효도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으며, 그 어머니가 일찌기 풍담(風痰)으로 여러 달 병에 누웠는데, 입은 옷에 띠를 풀지않고 자리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리 저리 약을 물었다. 의원의 말이 “능구렁이(花蛇)가 가장 좋은데, 때가 겨울이니, 어디서 얻겠는가!”
승호가 하늘을 부르며 물어 널리 구하니 끝내 얼음과 눈 쌓인 산에서 얻어 어머니 병이 즉시 나았다.

효자 천승호는 산적들도 교화시켜

그 후에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좋은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송아지를 시장에 팔아 받은 돈 10꿰미를 가지고 저녁에 돌아오다가 산골에서 갑자기 산적(山賊) 두 세명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돈을 뺏으니, 승호가 병든 어머니 봉양할 돈이라고 지성으로 울며 간청하니 말씨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적도들이,
“당신이 효자 천승호인가?”
”성명은 맞으나 효자는 아닙니다.”
“효자의 이름을 일찌기 귀 달갑게 들었소. 우리들이 비록 흉년으로 곤란하나 어찌 감히 효자의 돈을 뺏아 모친 봉양을 못하게 하리까?” 하며 백배사죄하며 가버렸다.
대개 성효(誠孝)가 동물을 감동시켜 능구렁이가 저절로 나왔고, 사람을 감동시켜 흉도(凶徒) 산적들이 저절로 교화(敎化)된 것이다.

열녀 이씨의 행적

효자 천승호 23세에 비로소 결혼하여 능히 부부의 도리를 다하여 또한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다하였다.
그 아내 경주 이씨는 본래 전통있는 가문의 딸로 천성이 순수하여 바탕과 행실이 정숙하며 이미 어진 부모의 훈계를 듣고 또 남편의 법도를 따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물 긷고 방아 찧고 길쌈하기 30여년에 혈기(血氣)가 이미 쇠약해도 절차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부지런 하였고 방이 차고 더운 문안까지 밤이나 낮이나 게으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50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五十而慕父母者) 사람인 것이다.
이웃 여자들이 감화되고 촌 아낙네들이 사모하고 본받아 시모 섬기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씨(李氏)를 일컬었으니, 만약 출천지효(出天之孝)가 아니면 그 사람을 감동 시키는 깊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정인년 4월에 그 남편 천승호가 문득 병에 걸려 점점 위독하게 되니 이씨가 백방으로 구호하다가 한결같은 정성으로 재계목욕하고 매일 밤 하늘에 빌어 자기 몸을 대신하기 원하였다.
그 남편이 운명하니 슬픔을 절제하여 곡성을 그치고 시어머니를 위안하여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는 것이니, 애통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며, 염습범절을 모두 남에게 맡기고 오직 시모 공양을 일로 삼으니 그 시모가 속병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편안한 체 하는 것을 알고 음식을 권하면 마시지 않고도 “마셨습니다.” 먹지 않고서도 “먹었습니다.”고 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 노비(奴婢)들이 가서 그 시모에게 아뢰니, 비로소 여러 날 동안 곡기(穀氣)를 끊은 줄 알고 손수 음식을 억지로 권하니 물 한 숟가락을 마시고는 피를 몇되나 토하니, 이것은 진실로 정(情)은 감출 수 있으나 피는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이들을 불러 이별하는 말이 “너희들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는 날, 내가 어찌 즉시 따라 떠나지 않으려했겠는가! 다만 할머니가 방에 계시기에 감히 거듭 마음의 상처를 드릴 수 없어 참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내 뜻은 이미 그때에 결정했었다. 지금은 네 아버지 상복을 입었고 할머님 마음도 조금 너그러워졌으며 또 봉양할 며느리가 있으니 내가 죽더라도 좋은 음식 대접은 그치지 않으리라.
너희들은 할머니가 계시고 나는 지하의 남편이 있으니, 살아 계신 할머니를 섬기고 죽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지금부터 길이 다르니라. 너희들은 너무 한탄하지 말거라.” 하시며, 또 양자로 간 아들 부부를 불러 말하기를, “내 죽은 뒤에 어린 동생들과 여동생들을 네가 거두어 길러 염려가 되지 않게 하라. 사람의 모든 행실이 어버이 섬김이 으뜸이요, 가정 다스리기에 완성되니 너는 모름지기 힘쓰고 힘써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거라.” 또 말하기를, “부부는 무덤까지 같이 간다는 옛말이 있느니라. 이것이 내 지하의 소원이다.” 하며, 말을 마치고 입을 닫으며 떠나니 그 곡기를 끊은 처음과 끝날을 계산하면 무릇 7일간이었다.

관내 유림들이 효자·열녀 부부로 추천

그 남편은 어질고도 효성스러우며 그 아내는 효도와 정렬이 겸비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미행을 포창하는 일이 거듭되지 않음이 아니나, 조정에서 효열(孝烈)을 드러내어 밝히는 혜택(정려각)은 아직 지금까지 받지 못했으므로, 도내(道內) 선비들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논한 끝에 상감의 행차가 왕릉을 뵈오러 가시는 때에 사유를 갖추어 말씀을 올렸더니, “도(道)에 조사토록 하겠노라”는 하교(下敎)가 있었기에, 도대표 유자(道代表 儒者)들이 뜻을 모아 이처럼 동의했고 본읍 사림이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연명하여 우러러 하소연하기를 즉시 실제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천승호의 지극한 효도를 포창하고, 그 처 이씨(李氏)의 높은 열행을 정려(旌閭) 내려 조정에서 권장하는 높은 은택으로 처분 해 달라는 글을 올려 나라에서 효자 열녀 정려(旌閭) 교지(敎旨)가 내려진 것이다.
효자 천승호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열녀 이씨를 숙인(淑人)으로 추증하고 효자 열녀 정려비를 1872년(고종9년)에 세워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