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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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7 - 구포의 명물 낙동장교(洛東長橋)

  • 1999-06-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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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구포다리의 본명은 낙동장교 (洛東長橋)

낙동장교(洛東長橋)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를 얼른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구포다리라고 하면 당장 알아 듣는다.
구포(龜浦)다리로 통칭(通稱)되고 있는 낙동장교(洛東長橋)는 1930년 9월 30일에 착공되어 3년간의 공사 끝에 1933년 3월 13일에 준공식을 가졌는데 다리의 길이는 1060m, 폭 8.4m, 교각(橋脚)이 56개인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긴 다리로서 낙동장교(洛東長橋)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김해군 대저면(강서구 대저동)과 동래군 구포면(북구 구포동)을 잇는 대공사로서 일본인 청부업자인 鹿島組에 청부되어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延人員)은 7,760명 이었고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70만원이 소요되었다.
낙동장교가 가설되기 전까지는 구포(龜浦)와 대저(大猪) 사이는 나룻배와 뗏목을 이용하여 왕래하는 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동차까지도 나룻배를 타고 건넜으니 그 불편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과 건너는 시간을 합치면 강을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 뿐만 아니라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든지 또는 상류지방의 강우(降雨)로 물이 불어나면 나룻배의 운행은 중지되고 강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될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곳에 다리를 가설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같은 논의는 김해지역 주민들사이에서부터 일기 시작하여 여러차례 주민 대표가 경남도청에 들어가 건의하는 등 모두가 발 벗고 나섬으로써 낙동장교 건설이라는 실질적인 문제에 근접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구포쪽에서는 다리 가설에 무관심하다.

경남 도청에서는 공사비의 일부를 몽리구역(蒙利區域) 주민에게 부담을 시켰는데 구포쪽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낙동다리가 놓여 지면 김해 일대에서 생산 된 농산물의 출하(出荷) 유통(流通)이 원활해져 김해지방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지만 낙동강 수로(水路)를 이용한 물자(物資) 교류의 중심지였던 구포지역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무관심 할 수 밖에 없었다.


장익원 구포면장의 일화

당시의 구포면장(龜浦面長)은 화명(華明)의 대지주로 구포의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구포은행(龜浦銀行)을 설립했던 장우석(張禹錫)의 차남 장익원(張翼遠)이었는데, 일본인 「와다나베」 경남도지사가 구포다리 공사비의 일부를 몽리구역 내에 있는 군면(郡面)에서 자진 부담시키기로 방침을 정하고 인근 군수(郡守), 면장(面長)들을 한사람씩 부산의 도청으로 불러 부담금을 자진해서 내도록 했다.
그런데 구포의 장익원(張翼遠) 면장은 구포다리가 가설됨으로해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곳은 구포로서, 낙동강 700리 연안에서 생산된 나락이 구포에서 도정(搗精)되어 국내는 물론 일본 등지로 수출하였고 강 유역의 과일과 야채 등의 청과물도 구포가 집산지였는데, 낙동강에 다리가 생기면 모든 물자가 다리를 통하여 부산으로 빠져나가게 되니 심대(甚大)한 타격을 받는 곳이 구포지역이라고 엄살을 부리니, 이러한 장 면장을 괘씸하게 생각한 일본인 도지사는 노발대발(怒發大發)하였다. 그래도 장 면장은 “구포에서는 1천원 정도의 부담을 하겠다”고 말하였던 바, 더욱 화가 난 도지사는 “그런 적은 돈은 안 받겠다.”고 까지 말하게 되었는데, 장면장은 그 말을 얼른 받아 부담금을 면제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게 되어 구포면은 장익원(張翼遠) 면장의 배짱으로 영영 부담금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김해쪽에서는 적극 협조 할 수 밖에 없어

그러나 김해군수(金海郡守)였던 황덕순(黃德純)은 구포다리가 가설되기까지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포와 김해, 대저(大渚)사이에는 나룻배가 있어 사람은 물론 땔나무와 차량까지 이 나룻배로 실어 날라야 했고, 장마가 계속되는 우기(雨期)에는 교통이 두절되어 서부경남을 직결하는 간선도로는 마비되고 김해군민들은 물바다속에 고립되었다. 이러한 불편을 몸소 겪었던 김해군민들은 다리 공사에 적극 협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5월 8일에 게재된 「낙동교 공사 진척(洛東橋工事進拓)」 이란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부산진-김해간 교통량 및 물동량 증가로 말미암아 하루 속히 낙동교 완공의 그날을 기대하는 지역 주민의 열의가 대단하다”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당시 부산-김해간 전철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이처럼 김해군민의 적극적인 열의로 이루어진 대교의 공사인지라 준공식도 역시 대저면(大渚面)의 들판에서 가졌다.
원래 중공 기념식을 구포에서 거행할 계획이었으나, 김해군민의 강력한 반대로 변경되어 김해 들판에서 가지게 되었으니 교량가설에 이렇다 할 성의를 표시한 일이 없는 구포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던 김해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준공기념식에는 부산시내와 김해군, 양산군 등지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경축행사였다.


다리에는 조명등도 설치했으나…

한편, 1933년 3월 낙동장교가 가설되고 이 대교에 조명등이 설치되었으며, 여기에 소비되는 전기료를 구포와 김해의 어느 쪽에서 부담하느냐하는 문제가 나와 옥신각신하다가 구포사람들이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즉 구포다리 위에서 양쪽 주민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하여 진 쪽이 전기료를 부담하기로 타협이 되어 전주민이 나와 승부(勝負)를 겨룬 결과 그것도 구포쪽이 승리하여 김해쪽이 고배(苦杯)를 마셔 조명등 전기 사용료는 김해쪽이 부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김해쪽 청년들이 몰려와 이 조명등 시설을 모두 부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낙동장교가 가설된 이후의 구포의 상경기(商景氣)가 실질적으로 다소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경남지방의 육로(陸路)와 경부선(京釜線) 철로의 교통요지로서의 새로운 면모로 바뀌었다.
건설당시 동양에서 제1의 긴 다리라고도 하고 혹은 국내에서 제일 긴 다리였던 장교(長橋)란 칭호도 지금은 사라졌다.
대저동에 서 있던 「낙동장교가설기념비(洛東長橋記念碑)」는 다리 가설 후에 낙동중학교 부근에 살던 일본인 석공에 의해 제작된 일본식 석비였다.
여기에 일본의 연호(年號)나 관리들의 위작(位爵)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8·15해방 이후에 이 부분을 시멘트로 지웠으나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196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때 일본을 규탄하던 지역청년들의 손에 의해 파괴, 유실되었다.


구포다릿목의 역할

구포다리는 서부경남을 잇는 유일한 교통로(交通路)로서 일제 말기에는 구포다리를 통해 김해의 곡물을 운반 할 수 없도록 감시소를 설치하였으며,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전쟁 물자와 군인들을 수송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부산과 경남지역의 산업물자와 농산물 수송 교류의 길목으로서 존재해 왔다.
그리고 김해와 진해쪽으로 가는 버스가 다릿목에 장시간 정류하였다가 출발하는 곳으로서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구포의 명산물인 구포배와 딸기를 파는 장사꾼들이 몰려와 버스창가에 매달리며 ‘내 배 사이소’, ‘내 딸 사이소’외쳤던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제 구포다리가 가설된지 6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노쇠(老衰)해 져서 1957년부터 무려 19회에 걸쳐 보수공사로 다리의 안전을 유지시켜 왔으나 교각일부가 내려 앉고 다리 폭이 좁아 78년 2월부터는 2.5톤 이상의 화물차 통행이 중단되는 등 쇠퇴일로(衰退一路)를 걷게되어 현재는 대저쪽으로 가는 일방통행의 소형차량이 운행되고 있으며 구포다리 남쪽으로 구포대교가 1996년 준공되어 새로운 통행로로서의 구실을 해 내고 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