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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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 문화·역사-팽우덕 장군

  • 2025-01-24 20:02:18
  • 정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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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 문화·역사-팽우덕 장군

우리 구 문화·역사-팽우덕 장군

우리 구 문화·역사-팽우덕 장군
우리 구 문화·역사-팽우덕 장군
우리 구 문화·역사
역사인물(팽우덕 장군)
 

정유재란때 정곤수의 딸과
팽우덕의 아들 팽신고의 귀화

 
창원 팽씨 시조 팽우덕

임진왜란때 명(明)의 50여 지원 장군중 어왜총병육군대도독(御倭摠兵陸軍大都督) 팽우덕(彭友德)과 아들 어사중승유격참장(御史中丞遊擊參將) 팽신고(彭信古)가 참전하여 공(功)을 세웠다.
팽우덕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오강현(吳江縣) 출신으로 전란이 끝난후 20대인 아들 팽신고와 귀국하였다. 명나라 멸망(1664년)때 팽신고는 정유재란때 만났던 동래정씨 문중 정곤수(鄭昆壽)의 딸과 아들 팽부산(彭釜山, 初名 富山)을 데리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부산에 영주(永住)하다 1667년(丁未, 현종 8) 사망하여 부산 만덕산(萬德山) 오좌(午坐, 정북향)에 장사하고 그 뒤 부인도 합장하였다.
1660년(현종 1) 충훈부(忠勳府)에서 팽우덕의 전공을 찬양하여 웅천 안곡동 고절산 임야를 하사하였으며, 정조가 내린 교지(御命下賜)에 의해 1797년(정조 21. 2월) 실묘(失墓)후 다시 찾은 팽우덕(유골과 유품)과 팽신고를 부산 만덕산(현, 상학산 가야골)에서 이곳 고절산(현재 진해 해군사관학교 내)으로 2대를 예장(禮葬)하였다.
1세 팽우덕은 호는 만정(晩亭),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으로 우리나라 절강 팽씨(창원 팽씨)의 시조가 되었고, 2세 팽신고는 호는 은재(隱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3세 팽부산의 모친은 동래정씨이며, 4세 팽낭기(彭郞己)는 정3품 사역원정(司譯院正) 5세 팽우창(彭雨昌)은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6세 팽흥석(彭興碩)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7세 팽수봉(彭壽鳳)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7세손 중 팽관석의 「은제유사(隱齊遺事)」 와 족보에도 기록되어있다. 그 후손들이 창원에 기거한 뒤로 오랫동안 계보를 이어왔으며, 2000년 1,578명으로 팽현숙(개그맨 최양락의 처)이 있다.
또한 후손들은 창원시 성산구 외동에 도강사(道岡祠)를 짓고 제향을 올리며, 공덕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浙江彭氏父子褒孝碑(절강팽씨부자포효비)”가 창원시 성산구 외동 626-4번지에 크기는 기단의 높이 95cm, 이수에서 비신까지 229cm, 비신 높이 157cm, 너비 62cm, 높이 28cm로 비문은 안명언(安明彦), 글씨 김성학(金成學), 후손 응주(應柱)가 1971년 10월 22일 세웠다.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