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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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구 문화역사 / 세거지(世居地) (상)

  • 2023-11-29 20:44:43
  • 정영미
  • 조회수 : 219

우리구 문화역사 / 세거지(世居地) (상)

우리구 문화역사 / 세거지(世居地) (상)
한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례 많아
 
우리고장에서도 집안이 한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례가 적지 않다. 화명에서는 평택 임씨, 파평 윤씨, 창원 정씨가 터를 닦았으며 금곡에서는 영천 이씨가 자리를 잡았다.
◇화명 와석 평택 임씨(平澤 林氏)=평택 임씨 도시조(都始祖) 임팔급(林八及)은 신라 이부상서와 충렬의 시호를 받았고, 시조는 임세춘(전객령계)과 임언수(충정공계)로 구분된다.
화명에 입향조인 충정공계 임회(林檜, 호 觀海, 1562~1624)는 1613년 이이첨 등 대북파의 무고로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임해의 3남 임득이와 4남 임득재가 와석에 거주하면서 관해공파의 문중을 형성했으며 장녀는 파평 윤씨 윤소와 결혼하여 세대를 이어온 북구지역의 명문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현재 관해재는 북구 화명대로 77번길에 재실을 모시고 해마다 제향를 올리고 있다.
◇화명 대천 파평 윤씨(坡平 尹氏)=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윤신달(尹莘達, 893~974)이다.
화명 대천 입향조 윤소(尹沼, 자 深遠 1596~1656)는 선조조 병조참판 윤안성의 7형제 중 5째 아들로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에 속하였고, 청 황제의 덕을 기리는 비석의 비문을 보고 항의하다 발각되어 인조 15년(1637) 화명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그후 사면을 받았으나 화명 대천에 남아 산천을 벗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장남 윤비은과 차남 윤명은을 두었으며, 차남 명은(1627~1688)은 대천마을에 정착하여 대천문중을 이루었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해 1936년 금호재(金湖齋, 이전 후, 북구 산성로 48번길 41)를 낙성해 제례를 올리며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화명 대천 창원 정씨(昌原 丁氏)=창원 정씨 시조는 의창군 정필진(丁必珍)으로 신라 헌강왕때 의창군으로 봉해졌으며, 화명 대천에 자리잡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입향조 정남수(丁南壽, 호 죽사, 1716~1779)는 모친을 모시고 화명 대천 양달마을에 죽사공파(竹史公派)를 세웠으며, 아들 5형제 중 장손 정지학(丁志鶴, 1738~1810)과 3남 정지붕(丁志鵬, 1752~1813)이 대천리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양산, 언양, 동래쪽으로 분산되었다.
◇금곡 공창 영천 이씨(永川 李氏)=영천 이씨 시조 이문한(李文漢)은 고려초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금곡 공창리에 입향한 영천 이씨는 양산 입향조 이구(1570년대 출생, 1640년대 사망 추정) 장군의 증손자 8명 중 영양군 이익문(李益文)으로 현재 100여호 250여명의 후손들이 공창, 좌천, 기장 등에 세거하며, 공창마을에 숭익정(崇益亭)을 지어 매년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김동국 / 낙동문화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희망북구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