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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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39

  • 1999-08-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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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홍수와 제방 치수(治水)의 역사

백 이 성 북구 낙동문화원 원장

홍수의 악순환을 거듭해 온 낙동강 하류

낙동강은 하류지역인 삼랑진 근방에서부터 강폭이 크게 좁아지는 지형이므로 비가 많이 내리면 불어난 수량(水量)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데 김해 대동면 월당(月堂) 나루터 앞까지 흘러오면 여기에서 다시 강의 흐름이 급하게 꺾여져 범람한 물은 서낙동강쪽으로 빠지고 일부는 동쪽의 구포, 사상 앞으로 빠지게 되니 그 사이의 삼각주는 양쪽으로 미처 빠지지 못한 물이 덮치어 졸지에 물바다가 되기 마련이었다.
예로부터 낙동강에 홍수가 날때마다 하구지역은 시련을 겪어 왔다.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수백, 수천년의 세월 속에 살아온 주민들에게 자나깨나 염원했던 소망은 물 난리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놓고 살아 봤으면 하는 일념뿐이었다.

여름만 되면 악순환을 거듭해 온 낙동강 홍수에 대한 문헌의 대표적인 기록을 살펴보자.

(1) 신라시대
- 진평왕 11년(589년)7월:나라의 서쪽에 큰 물이 나서 민호(民戶) 30,360호가 표몰(漂沒)되고 죽은 사람이 200여명이었다.
(2) 고려시대
- 공민왕 7년(1358년) 5월:경상도에 큰 물이나서 많은 곡식이 떠내려 갔다.
(3) 조선시대
- 선조38년(1605년) 7월:영남에 큰 물이나서 공사(公私)의 가옥이 떠내려가고 빠져 죽은 사람과 가축수는 적을 수 없을 만큼 많다.
- 정조5년(1781년) 8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410여호가 물에 잠겼다.
- 순조23년(1823년) 6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3,800여호가 떠내려가고 무너졌으며 80여명이 죽었다.
- 헌종5년(1839년) 8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3,100여호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고 40여명이 죽었다.
- 철종8년(1857년) 8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2,700여호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고 200여명이 죽었다.
- 고종2년(1865년) 8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1,700여호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고 250여명이 죽었다.
- 고종22년(1885년) 8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6,000여호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고 90여명이 죽었다.
- 고종28년(1891년) 12월:경상도에 큰 물이 나서 5,000여호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고 170여명이 죽었다.
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록(史錄)에 나온 큰 물난리를 가려 뽑아서도 이처럼 엄청난 홍수피해에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와서도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만해도 거의 연례행사처럼 홍수의 시련은 계속되어 왔고 그 피해는 더욱 증가해 왔다.
낙동강 하류지역의 1910년대~1920년대까지 홍수피해를 살펴보자.
·1916. 가옥 유실 붕괴(2,641) 익사자(151)
·1917 7. 7 가옥유실 붕괴(1,260) 익사자(103)
·1919 7. 9 가옥유실 붕괴(420) 익사자(97)
·1920 7.22 가옥유실 붕괴(7,170) 익사자(1,100)
·1921 7.13 가옥유실 붕괴(62) 익사자(6)
·1922 7.9 가옥유실 붕괴(264) 익사자(17)
·1923 7.27 가옥유실 붕괴(133) 익사자(22)
·1924 7.13 가옥유실 붕괴(204) 익사자(5)
·1925 7.13 가옥유실 붕괴(6,510) 익사자(47)
·1926 9.13 가옥유실 붕괴(243) 익사자(5)
·1927 8.10 가옥유실 붕괴(3) 익사자(0)
이처럼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만해도 낙동강 하류지역의 홍수로 가옥이 유실되거나 무너지고 익사자가 해마다 속출하는 악순환을 겪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제방을 쌓았던 하구지역

고려시대 기록에 삼차수(三叉水)로 흘렀던 낙동강 하구 지역은 퇴적 삼각주(三角州)로서 여름철 물난리만 겪으면 세갈래 큰 물줄기의 흐름도 변형시켜 놓곤하였다.
어제의 모래톱이 거센 물길에 허물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물길이 열리고 물길이 흐르던 곳에 모래톱이 메워져 땅으로 변했던 것이다. 삼차수 물길 속에 조성된 하중도(河中島) 중에 제일 큰 섬이 대저도(大渚島)였다.
그리고 대저도의 동쪽으로 소요저도(所要渚島), 사두도(蛇頭島) 등 작은 섬이 지도에 나타나 있고 그 아래 하구 끝머리에 명지도(鳴旨島)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하중도 중에서 대저도는 조선시대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여름철 물난리를 이겨내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나온다. 그리고 구포지역과는 달리 저습지대였던 사상지역에는 모라동에서 주례동까지 17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안쪽 샛강에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당시 동래부사 공덕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또한 양산군 좌이면에 속했던 유도(柳島)에도 제방을 쌓고 사람들이 살면서 농사를 지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서낙동강 쪽에서도 대저도에서 가락동쪽으로 산태방(山汰坊) 둑을 쌓아 수해를 막아보겠다는 의지가 점철되어 왔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쌓은 제방도 여름철 대홍수만 지면 거센 물길속에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땀 흘려 가꾼 농작물도 휩쓸려갔다.
이러한 악순환속에서 세월이 흘러간 후 1930년대에 와서야 근대식 공법에 의한 제방공사가 일제의 주도아래 시작되었고 제방의 완공과 함께 김해평야는 전원지대로 정착하게 되었다.

낙동강 제방 축조공사(1930년대)

일제는 김해평야의 기름진 땅에 눈독을 들여 한·일 합병 후 1910년대부터 수리(水理)사업을 벌여왔다.
1930년대에 들어와 구포다리 가설공사와 함께 강의 동서 양쪽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제방 축조의 목적은 김해평야지대를 홍수와 해일의 피해에서 벗어 나게하여 농경지의 안전수리답(安全水理畓)을 조성하기 위한 관개용수(灌漑用水)의 확보에 있었다.
그래서 제방 축조와 함께 낙동강의 본류였던 서낙동강의 대저와 대동지역에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강물의 흐름을 막아 구포쪽으로 본류가 흐르게 하였고 녹산 쪽에도 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서낙동강의 대동수문과 녹산수문에 이르기까지 제방을 쌓고 하구 아래쪽 명지도에서 녹산동 성산에 이르는 곳에도 제방을 축조하였다.
강 동쪽으로 구포에서 사상 엄궁리에 이르기까지 13㎞에 제방을 쌓았다. 이로써 서낙동강으로 흐르던 물은 차단되어 구포, 사상을 거쳐 하단쪽으로 모아 흐르게 되었고 서낙동강과 평강천, 맥도강, 조만강 등은 하나의 호수처럼 갇힌 물이 되었다.
그런데 제방공사를 하던 1933년 7월에도 대홍수가 나서 제방이 붕괴되고 김해평야는 물바다가 되기도 했고 1934년 7월에도 강우량 514㎜의 기록 속에 대홍수가 져서 완공단계의 제방이 터지고 물금~구포사이의 경부선 철로가 1㎞ 정도 유실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5년 제방이 완공된 후 1936년 8월의 대 홍수때부터 수해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종수정일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