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리 구 문화·역사, 역사인물(김기장군 2)
- 2024-12-26 15:49:39
- 정영춘
- 조회수 : 784



나라의 위급에 일신을 버려 향토를 지키다 순국하다
24공신 공적비(功績碑)
동래부는 나라의 관문이라 임란의 화(禍)를 제일 먼저 당한 고장이었다. 당시 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하여 왜적을 무찌르기에 값진 피를 흘린 분들은 무수하였다.
대군 앞에 성(城)은 함락되었지만 애국지민의 충의가 목숨을 홍모(鴻毛)와 같이하였다. 살아남은 목숨조차도 7년간이나 의병의 대열에서 분전하였고 또는 지조를 지켰다. 난후공신록(亂後功臣錄)에 이름이 오른자 실로 무수하나 그중에도 가장 공적이 뛰어난 분들이 24공신이다.
그러므로 이 고장은 후인들이 일러 충의지방이라 한다. 임란 7년은 형극의 세월이라 난을 예방하지 못하였음에 부끄러움이 있지만 난을 맞아 순국하였던 선열과 끝까지 항전 저항하였던 의사를 생각하면 이 분들이 남긴 그 교훈의 뜨거움에 가슴이 저려들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나라의 위급에 일신을 버려 향토를 지키다 순국한 의열들의 덕행과 전공을 기리며 그 뜻을 받들기 위해 24제공(諸公)의 고명(高名)을 이 돌에 새긴다.
1987년 3월 일 부산광역시 근수(謹竪)
충렬사지 별전공신(別典功臣)
충렬사에 동래부의 임진왜란 66공신 중 별전 24공신이 배향(配享)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임진왜란 때에 그 용절을 분발하여 몸을 잊고 어려움을 무릅쓰며, 7년 동안의 도탄 속에서도 시종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한 분들로, 그 의열이 늠연하고 공적이 현저하다. 나라에서는 각기 전(田) 1결(結)을 급복하고 아울러 각호(各戶)에 노비 일구를 허급(許給)하여 각별히 완호하도록 하였으며, 대소의 차역(差役)을 일체 감면토록 하였다. 이처럼 충의를 정표(旌表)하여 강상(綱常)을 진작하고, 공노에 보답하여 풍속을 장려한 것은 그 착한 자를 권장하고 착하지 않은 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게 하고자 함이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포충복호문(褒忠復戶文)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1608년 기록한 포충복호문 김기 편(編)에 “판관 김기는 임진변란 이후 본부인(東萊府)이 전투에 져서 뿔뿔이 흩어질 때에 끝내 관(官)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리고 24공신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
24공신 공적비(功績碑)
동래부는 나라의 관문이라 임란의 화(禍)를 제일 먼저 당한 고장이었다. 당시 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하여 왜적을 무찌르기에 값진 피를 흘린 분들은 무수하였다.
대군 앞에 성(城)은 함락되었지만 애국지민의 충의가 목숨을 홍모(鴻毛)와 같이하였다. 살아남은 목숨조차도 7년간이나 의병의 대열에서 분전하였고 또는 지조를 지켰다. 난후공신록(亂後功臣錄)에 이름이 오른자 실로 무수하나 그중에도 가장 공적이 뛰어난 분들이 24공신이다.
그러므로 이 고장은 후인들이 일러 충의지방이라 한다. 임란 7년은 형극의 세월이라 난을 예방하지 못하였음에 부끄러움이 있지만 난을 맞아 순국하였던 선열과 끝까지 항전 저항하였던 의사를 생각하면 이 분들이 남긴 그 교훈의 뜨거움에 가슴이 저려들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나라의 위급에 일신을 버려 향토를 지키다 순국한 의열들의 덕행과 전공을 기리며 그 뜻을 받들기 위해 24제공(諸公)의 고명(高名)을 이 돌에 새긴다.
1987년 3월 일 부산광역시 근수(謹竪)
충렬사지 별전공신(別典功臣)
충렬사에 동래부의 임진왜란 66공신 중 별전 24공신이 배향(配享)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임진왜란 때에 그 용절을 분발하여 몸을 잊고 어려움을 무릅쓰며, 7년 동안의 도탄 속에서도 시종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한 분들로, 그 의열이 늠연하고 공적이 현저하다. 나라에서는 각기 전(田) 1결(結)을 급복하고 아울러 각호(各戶)에 노비 일구를 허급(許給)하여 각별히 완호하도록 하였으며, 대소의 차역(差役)을 일체 감면토록 하였다. 이처럼 충의를 정표(旌表)하여 강상(綱常)을 진작하고, 공노에 보답하여 풍속을 장려한 것은 그 착한 자를 권장하고 착하지 않은 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게 하고자 함이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포충복호문(褒忠復戶文)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1608년 기록한 포충복호문 김기 편(編)에 “판관 김기는 임진변란 이후 본부인(東萊府)이 전투에 져서 뿔뿔이 흩어질 때에 끝내 관(官)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리고 24공신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