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리 구 문화·역사, 역사인물(김기장군 1편)
- 2024-11-23 13:08:59
- 정영춘
- 조회수 : 433



‘김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제일 먼저 조국수호에 앞장서
세거(世居)
광주김씨는 신라 경순왕 후예로서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의 7세손 김록광(金錄光)이 고려 상장군으로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공훈을 세워 광주군(廣州君)으로 봉(封)해지면서 록광을 시조로 분종(分宗)했다.
7세손 김차문(金次文)은 호는 독당(篤堂) 공조참의, 호조판서에 증직 되었는데, 동래로 입향하여 세거를 이루며 광주김씨 동래문중을 형성하게 되었다.
행적(行蹟)
김기는 광주김씨 11세손으로 자(字)는 화경(和卿), 호는 호수(湖)이며, 조선 명종 갑인년(1554년) 10월 20일 출생하고, 부인은 연안이씨로 이여명의 딸로 을묘년(1555년) 3월 3일생이다. 임진년(1592년) 난리에 섬 오랑캐가 바다를 건너 바로 서울로 향하니, 모두 흩어졌다.
이때 호수공이 판관(判官)으로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동지 20여명과 함께 향리의 용사들을 불러모아 싸웠으나 적은 군사로 많은 적(敵)을 당해 낼수 없었다.
포위망을 뚫고 동래성안으로 들어가 부사 송상현과 더불어 함께 순절하였다.
결의하였던 사람들이 그 시체를 동래군 만덕산 구암(九岩) 자좌원(子坐原) 땅에 안치하고 부인 연안이씨 이여명의 딸과 합장하였다.
김기장군(金琦將軍)의 후손들은 만덕 사기마을, 중리마을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제종형 김우정과 온천1동 달북에 향경재를 짓고 향사(享祀)를 이어오고 있다.
향경재(鄕敬齋)
향경재는 160여년 전에 동래부사 강노(姜)가 관과 동래지역 전사림의 협력으로 창건하여 제호(題號)를 향경재라하고 해수 김우정을 향사하고 본손(本 계속 보존되어 오다가, 1978년 부산광역시와 동래 유림들의 건의로 선무원종1등공신 호수 김기공을 추가 배향하였다.
※향경재 위치: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 129번길 98-23(달북마을)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
세거(世居)
광주김씨는 신라 경순왕 후예로서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의 7세손 김록광(金錄光)이 고려 상장군으로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공훈을 세워 광주군(廣州君)으로 봉(封)해지면서 록광을 시조로 분종(分宗)했다.
7세손 김차문(金次文)은 호는 독당(篤堂) 공조참의, 호조판서에 증직 되었는데, 동래로 입향하여 세거를 이루며 광주김씨 동래문중을 형성하게 되었다.
행적(行蹟)
김기는 광주김씨 11세손으로 자(字)는 화경(和卿), 호는 호수(湖)이며, 조선 명종 갑인년(1554년) 10월 20일 출생하고, 부인은 연안이씨로 이여명의 딸로 을묘년(1555년) 3월 3일생이다. 임진년(1592년) 난리에 섬 오랑캐가 바다를 건너 바로 서울로 향하니, 모두 흩어졌다.
이때 호수공이 판관(判官)으로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동지 20여명과 함께 향리의 용사들을 불러모아 싸웠으나 적은 군사로 많은 적(敵)을 당해 낼수 없었다.
포위망을 뚫고 동래성안으로 들어가 부사 송상현과 더불어 함께 순절하였다.
결의하였던 사람들이 그 시체를 동래군 만덕산 구암(九岩) 자좌원(子坐原) 땅에 안치하고 부인 연안이씨 이여명의 딸과 합장하였다.
김기장군(金琦將軍)의 후손들은 만덕 사기마을, 중리마을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제종형 김우정과 온천1동 달북에 향경재를 짓고 향사(享祀)를 이어오고 있다.
향경재(鄕敬齋)
향경재는 160여년 전에 동래부사 강노(姜)가 관과 동래지역 전사림의 협력으로 창건하여 제호(題號)를 향경재라하고 해수 김우정을 향사하고 본손(本 계속 보존되어 오다가, 1978년 부산광역시와 동래 유림들의 건의로 선무원종1등공신 호수 김기공을 추가 배향하였다.
※향경재 위치: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 129번길 98-23(달북마을)
김동국 /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